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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nker Jul 07. 2020

마당의 크기

chapter.8



‘너 어디 살아?’


내가 20년간 살아온 북평동에서는 5일장이 섰다. 그리고 친구들의 어디사냐는 질문에 ‘장서는 곳 알지? 그 삼척 가는 방향⋯북평⋯’이라는 말을 붙여 설명하곤 했다. 부곡동이나 천곡동에 사는 친구들에게는 북평동이 가깝지 않은 동네였다. ‘아⋯들어본적은있지’ 혹은 ‘장날 때 엄마랑 가봤어’라는 대답을 하곤 했으니까.


시장의 규모는 꽤나 컸다. 대형마트와같이 수산물 코너, 농산물 코너, 생활용품 코너, 동물 코너들로 나누어져 상인들과 손님들로 북적거렸으며, 외부로 나가는 버스안에서는 젓갈냄새와 생선 비린내로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그 시절 나는 시장의 끝자락에 위치한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녔었고, 하교길은 반드시 시장을 가로질러야만 집으로 갈 수 있었다. 할머니는 집 앞 작지 않은 밭에 농작물을 키웠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생 때는 가끔 삼촌이 시장에 나와 밭에서 수확한 농작물을 팔기도 했다. 삼촌은 아빠의 여러 형제 중 넷 째였는데 어릴 적 소아마비로 온몸과 얼굴 근육이 뒤틀려 절뚝거리며 걸었다.  나는 시장에서 삼촌을 자주 만났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절뚝거리는 삼촌은 언제나 눈에 띄었다. 그리고 삼촌은 나를 만나면 사탕수레 아저씨에게 데려가 5백원을 내고 사탕을 한줌 사주거나, 거리가 조금 있는 문방구에서 엄마가 못하게 하는 뽑기를 하게 해주었다. 주말마다 보는 삼촌이었다. 그러나 시장에서 만나는 삼촌은 더 반가웠다. 나는 작은 발발이 강아지 마냥 꼬리를 흔들며 삼촌한테 안겼고, 삼촌도 그런 내가 싫지 않은 듯했다.


시장에서 15분을 걸어가면 진미슈퍼가 나온다. 갈때마다 물건의 가격이 달라지는, 아주 작은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슈퍼였다. 슈퍼 위로는 땅딸보 아파트가 4채정도 있고, 그 위로는 계절마다 색이 변하는 넓은 논이 펼쳐진다. 그리고 위로 기차가 지나가는 작은 굴다리가 두개 있는데, 삼촌들은 그곳에 귀신이 나타난다고 했다. 같은 귀신을 두번이나 봤을 정도로 자주 나타난다며, 괜스레 으스스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우리가 무서워하던 굴다리를 지나고 나면 오른쪽에는 도랑이 흐르며 왼쪽에는 산과 논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지나고 나면 나의 마당, 단봉동 집이 있었다. 우리는 치킨을 시켜 먹을 때면 한참을 고생했다.

“진미슈퍼위로 쭈욱 올라오시다보면 굴다리 두개가 있어요 지나서 계속 올라오셔야 해요. 그럼 오른쪽에 큰 기와집이 있어요 앞에 주차장 있는 곳! 거기로 후라이드 반 양념 반 가져다주세요!” 거절도 수 차례 당했다. 그럴 때면 결국 삼촌들 중 한 명이 치킨을 가지러 가곤 했다. 그만큼 말로는 위치를 설명할 수 없는 애매한 곳에 있는 집이었다.


그곳은 ‘심상열가옥’이라는 이름을 가진 강원도유형문화재의 집이었다. 심상열 가옥이라면 당연히 심씨가 살고있겠구나 하겠지만 우리는 배씨였고, 배씨의 흥부네가 그곳에 살게 된 것은 기뻐해야 하는건지 모를 만한 사연이 있었다. 1989년 경북 봉화에 살던 흥부네 가족은 동해시 단봉동으로 이사를 왔다. 물론 빈집은 아니었다. 그 집의 주인인 심씨가 ㅁ자가옥의 ㄷ 모양을 썼고, 배씨 흥부네가 가느다란 ㅣ 모양의 작은 공간을 썼다. 월세는 없는 더부살이의 삶이었다. 60살의 배씨네 할머니는 심씨네 병든 할머니를 극진히 모셨고, 할머니가 돌아가시며 배씨 흥부네에게 그 집을 주었다. 그 집은 1985년도 문화재로 지정되며 이제 판매될 수 없는 가치의 집이 되었다. 우리가 살고 싶은 만큼 살고 나가면 그 이후로 나라가 관리하게 된다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심씨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된 이후로 배씨 흥부네는 ㅁ 모양의 집을 모두 쓰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넷째와 다섯째 그리고 할머니만 남고 배씨 흥부네는 각자의 인생을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이 모든 것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다섯째 삼촌은 아빠와 일을 함께 하는 바람에 늘 바빴다. 그래서 대부분의 단봉동 집안일은 넷째 삼촌의 몫이었다. 단봉동 집에는 항상 서너마리의 소를 키웠다. 몸을 절뚝였던 넷째 삼촌은 커다란 가마솥에 소여물을 끓였고, 노란 리어카 위에 가득 소 똥을 쌓아 밭으로 날랐다. 나는 매주 단봉동 마당에서 드럼통을 잘라 만든 바비큐통 위에 고기를 구워 먹었고, 텐트를 치고 마당에서 자기도 했다. 호수를 잡고 물놀이를 했고, 고스톱을 치는 삼촌 옆에서 돈을 세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절뚝거리는 삼촌의 뒤를 따르며 눈이 내린 앞 산으로 비료포대를 들고 올라가 썰매를 함께 타기도 했다.


나의 마당의 넓이는 무척이나 넓었다. 윈도우98의 컴퓨터가 있었으나 키지 않을 정도로 마당은 넓고 재미있는 것이 넘쳤다. 남과 가족을 알아봤던 똑똑한 발발이 쭈쭈가 있었고, 대나무숲에는 흑염소가 있었고, 다 타버린 연탄덩어리가 있었다. 하지만 쭈쭈가 단봉 집에서 10년을 살았을 무렵, 쭈쭈는 병에 걸렸고, 할머니는 가차없이 개장수에게 5천원을 받고 팔아버렸다. 그리고 2009년, 삼촌은 장애인의 자신의 몸을 탓하며, ‘외롭다’는 말을 연신 뱉어냈고 얼마지나지않아 농약을 마시곤 죽어버렸다.


모든 가족들은 삼촌이 면역력이 약해 합병증으로 인해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나는 가족들에게 떠밀려 장례식장에 온지 5분만에 떠나는 삼촌에게 인사만을 가볍게 하곤 집으로 갔고 며칠전까지 함께 했던 삼촌이 더 이상 없음을 허무해 했다. 이후 1년뒤쯤 삼촌의 죽음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단봉동 집에 갈때마다 미안함과 당황스러움이 뒤섞여 괴로울 만큼 마음이 따끔거렸다.


어제 팀장님과 나는 가까운 사패산에 등산을 했고, 정상에서 보이는 수많은 아파트를 보며 ‘이렇게 아파트가 많은데 내 집이 없네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팀장님은 ‘아파트가 뭐가 좋니? 나는 작은 평수여도 마당 있는 집에 살고 싶다’라며 대답을 하셨다. 팀장님과 헤어지고 집에 오는 길 나는 작은 평수의 마당 있는 집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 단봉동 집의 마당과 추억들이 떠올랐다. 그 마당의 크기는 평수 따위로 계산할 수 없다. 그 마당은 내가 되어, 모든 추억과 삼촌에 대한 미안함, 때로의 괴로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흥부네 가족 앞에서 슬픔조차 표현할 수 없었던, 외딴사람이 된 것만 같은 서운함과 괴로움, 따끔한 마음, 미안함의 응어리들이 모래와 같이 쌓였다. 그리고 서서히 굳어져 커다란 바위가 되었다. 그 바위는 이제 나의 마당 한 가운데 박혀 자리 잡혀 있고 더 이상 옴짝달싹하지 않는다.


사람이 자살을 하면 하늘로 승천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돈다고 한다. 살아생전 삼촌은 내가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고 항상 이야기했었지만, 나는 좋은 사람, 괜찮은 어른이 아직 되지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삼촌이 세상을 떠돌며 보게 될 나는 작은 발발이 강아지처럼, 밉지만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오늘따라 삼촌이 아주 많이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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