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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nker Jul 21. 2020

쌓여가는 팬티 개수만큼의 책임감

chapter.9



신도빌라로 세 들어 산지도 6개월쯤 되었다. 그리고 적응을 하고 나니 내 몸속에 외로움이라는 거머리가 착 하고 달라붙어 기생하기 시작했다. 잠시나마 동물을 키워볼까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을 포기한 건 무엇보다 죄책감이 생기기 싫어서다.


요즘 따라 새롭게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것이 굉장히 힘들다. 그것은 뭐랄까⋯ 화초를 키우는 것과 같은 귀찮음이 있다. 물론 초록초록한 화초가 집에 있을 때 시각적인 즐거움은 있다. 그러나 매주 물을 줘야 하고, 그것을 한주라도 잊는 날에는 끝에서부터 메말라가기 시작하는 것을 봐야만한다. 푸르르던 잎파리가 서서히 갈색 빛깔을 띄고, 어느 순간 잎을 당기면 흙에서부터 뿌리가 쑤욱 하고 빠져나온다. 그렇게 결국은 끝까지 바싹 말라버려 내손으로 내버려야 하는 상황이 온다. 나는 매번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도 우아한 플로리스트의 모습을 떠올리며 화초를 산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갈색 빛깔의 화초를 사각사각 접어 종량제 봉투에 쑤셔 넣는다. 그때, 내 죄책감도 함께 접혀 들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는 더 이상 사들이지 못할 정도로 여럿 죽어 나간 화초들에 대한 미안함이 내 속에 자리잡았다.


인간관계 역시 그렇다. 손질하지 못해 잘라낸 인간관계가 인생에 얼마나 많은가. 화초처럼 시들어가는 인간관계를 보는 것만으로도 고역이고 억지로 물을 주자니 기한 없는 노동에 그것도 귀찮다. 나는 그냥 무언가를 돌보는 것에 재주가 없는 사람이다. (물론 의지도 없다)


이제는 자위를 하기 시작한다. 인간관계 까이꺼 안하면 어때. 혼자 잘 먹고 잘살면 되지. 안 그래?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 고난이도의 생각을 해본다.


그럼 결혼은?


물론 거기에 대해서도 할말은 많다. 이제는 책임감으로 인해 죄책감을 가지기가 무척이나 싫다. 책임감을 가지는 일은 지금 현재의 직장으로 충분하다. 직장에서의 일은 하는 만큼 성과가 돌아온다는 것이 참으로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사람에게 칭찬을 갈구해야 하는 것이 아닌 눈에 보이는 실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 나를 외롭게 하지 않는다. 보상도 스트레스도 이정도면 충분하다. 집에 돌아와 식탁에서 쓰여지는 일기도, 이 글도, 한잔의 맥주도, 담배도 마음에 든다. 머리를 쓸어내릴 때마다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카락의 수, 빨래바구니에 쌓여가는 팬티의 수, 딱 그만큼의 책임감. 모든 것이 적당하다.


내가 모든 것에 적당함을 느끼기 시작한 건 얼마되지 않았다. 10개월간 애인과 동거를 했었고, 잠시나마 부부의 형태로 살았다. 결론적으로 실패했지만 말이다. 서 너 달은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요리를 하고 퇴근시간을 기다리고 같이 장을 보고 미래를 함께 꿈꾸고⋯ 그것은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나는 모든 내게 지어지는 짐이 n분의 1로 나뉘는 것 같았다. 그럼 나는 1이 아닌 0.5정도다. 훨씬 홀가분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착각임을 느낀다. 내 것이 당연 반쯤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방의 짐의 절반도 내가 이고 져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심지어 책임감이라고 부르는 무언가도 한 몫 한다. 그리고 가장 문제였던 건 쩐이다. 수도세도 두배 전기세도 두배 가스비도 두배 식비도 두배. 그 당시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되 경제활동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애인은 정말 고맙게도 월세와 2인분의 공과금을 냈다. 그 대신 모든 집안일을 전적으로 내가 하기로 합의했다. 공과금이 2인분이었던것처럼, 쌓여가는 팬티의 개수, 수건의 개수, 접시와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2인분. 우리는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본인이 한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억울함을 느끼며 책임을 떠밀기 바빴고, 서로 탓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너무 어렸던 것 같기도 하다. 애인의 성실함으로 우리의 시간은 무탈하게 이어져갔으니까. 밥을 굶지도 않았으며, 월세가 밀리거나 공과금을 못 내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때 억울했던 건 집안일은 아무리 해도 티가 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월세나 공과금은 지불하면 확실한 증거가 있고, 그것을 토대로 앞세워 본인의 성과를 이야기할 수 있지만, 집안일은 “너 청소 하긴하니? 며칠전에 먼지가 굴러다니던데?” 라고 이야기하면 CCTV를 달아 놓을 수도 없고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애인의 무의식에 뱉는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투의 말들에 허무함을 느꼈다. 뭐 결국은 한바탕 크게 싸우곤 대출을 받아 짐을 싸와 나와버렸지만 말이다.


부부의 형태와 가까운 생활에서 문제는 둘사이 문제 뿐만이 아니다. 가끔 만나는 애인의 가족은 내게 ‘네가 일을 하면 얼마나 번다고. 결혼하면 일 그만둬’ 또는 ‘여자는 집에서 애만 잘 키우면 되지’ 따위의 이야기를 서슴없이 했다. 애인의 잘못은 분명 아니었는데 그냥 뭔가 잘못 흘러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우리 아빠가 나 그러라고 대학까지 보낸 거 아니거든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가득 찼지만, 그 말을 내뱉었다가는 뒷감당이 감당 되지 못 할 듯해 그만뒀다.


여하튼 무언가 더해지는 것은 굉장히 신중해야 할 문제다. 그리고 최수종과 하희라, 션과 이혜영과 같은 인연은 착한 사람을 만난다고 끝나는 것 또한 아니다. 그만큼 나와 맞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 어쩌면 로또1등과 같은 일이며, 맞는 사람과 변함없이 평생을 산다는 것은 더블로 로또1등을 당첨된 것이나 다름없다.


아직은 신중의 신중을 더할 때. 현재의 세탁기 속 팬티개수에 만족하며, 빨래나 널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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