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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uze Apr 25. 2020

망했으면 망했다고 인정해야 한다

어느 날 나타난 신체화 증상 수습 중에 얻은 교훈    

요새 어찌 지내고 있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난 그냥 목소리를 높여 명랑하게 말한다. "그냥, 망했어요!" 그러면 다들 순간 어이없어하면서도 살짝 분위기가 밝아진다. 그렇지 않아도 꿀꿀한 이때, 해맑게 '완전 망했다'는 사람도 있으니 난 좀 괜찮은 건가, 슬몃 안심이 되는 눈치다. 그렇게 나의 찌질함이 모두의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난 괜찮다. 어차피 망한 거 맞으니까 누구 한 사람이라도 기분 좋은 게 낫지 않나. 


그냥 망했다고 이야기하고 다니는 건 나름 한 5개월 간 일종의 '자가치료'를 하고 얻은 결론이다. 지금도 살짝 현재 진행형이긴 한데, 지난겨울 어느 날 친구랑 밥 잘 먹고 헤어져서 버스 타고 강남에 가다가 일종의 공황 발작 같은 걸 겪었다. 퇴근 시간도 안 됐는데 한강을 건너는 다리가 꽉 막혀 버렸다. 다들 어쩔 도리없이 멈춰서 있는데 갑자기 견인차 한 대가 뒤에서 사이렌을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사고현장에 빨리 가려고 안달인 모양이었지만 옴짝달짝할 수 없이 빽빽한 다리 위니 다들 비켜줄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견인차는 사이렌을 끄지 않고 줄기차게 울려댔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사이렌에 맞춰 가슴이 벌렁벌렁 뛰면서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차가 막혀도 조금만 있으면 어떻게든 길이 뚫릴 텐데 그때는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지금 여기서 기절할 것만 같았고 그러면 사람들이 날 이상하게 볼까 봐 무서웠다. 불안감이 절정에 달해 더 이상은 못 참을 것 같아 다리 복판이고 뭐고 내려달라고 기사님한테 뛰어가려던 순간, 느릿느릿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간신히 다음 정류장에 내릴 수 있었다. 온몸에서 기가 빠졌다. 


그 일을 친한 사람들에게 농담 삼아 말하던 두 달 후 다시 일이 일어났다. 그날도 친구와 헤어져 버스에 탔는데 사거리가 꽉 막혀서 움직이지 않았다. 차내에 사람도 별로 안 많았는데 갑자기 숨이 막히고 어지러웠다. 이대로 계속 버스에 타고 있으면 큰일이 날 것 같은 생각에 손마디가 하얘질 만큼 필사적으로 손잡이를 붙잡고 있다가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바람을 쐬면 괜찮을 것 같아서 한 정류장을 걸어가서 다시 버스를 탔지만 다시 한 정류장 만에 내렸다. 이제는 환히 불을 밝힌 버스가 다가오고 그 안에 앉은 사람들이 보이기만 해도 두려워졌다. 결국 다시 버스를 타지 못하고 네 정류장 거리 정도를 걸어서 집에 갔다. 바람이 불고 추운 저녁이었다. 


버스를 못 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평소 길이 막혀도 좋으니 사람이랑 풍경 구경하는 재미에 일부러 전철 대신 버스를 타기도 했는데. 무엇보다 버스든 지하철이든 타야 어디든 이동할 수 있는 건데 이걸 못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 지나가는 것만 봐도 어지럼증이 나서 차를 못 타는 엄마가 딸의 결혼식을 보러 이백리 길을 걷는다는 줄거리의 영화도 생각났다.(찾아보니 고두심 배우가 나오는 2005년작 <엄마>였음)


사실 난 이쪽(?) 계통으로는 선무당 격이다. 일 때문에 신경정신과 전문의, 상담심리 전문가들도 꽤 만나봤고 관련 책들도 많이 읽은 편이다. 우울증, 조울증, 공황장애, 불안장애, 경계성 인격장애 등등 병명들도 익숙하고, 바리움, 팍실, 인데놀, 자낙스, 프로작 등 약 이름도 낯설지 않다. 주변에 이미 전문가의 도움을 받은 지인들도 많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사자가 된다는 건 또 다른 경험이었다. 짐작은 했지만 초록창에 '버스 타기'와 '공황장애'를 함께 검색했을 때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사례들은 나를 더 우울하게 했다. 유명 연예인들을 비롯해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다는 게 마음이 놓이면서도 또 막상 밖에 나가보면 딴 사람들은 다 멀쩡해 보인다. 그래서 더 막막하고 슬퍼진다. 나만 찌질하게 놀고 있고 남들은 다 잘 나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반백수도 괴로운데 이건 또 뭐람. 


이상 증상이 나타났을 때는 시간 끌지 말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 는 게 마음의 병을 다룬 수많은 콘텐츠에 나와 있는 말이다. 나 또한 그런 증상을 호소하는 지인에게 가장 먼저 그런 말을 하곤 했다. 그런데 막상 실전은 달랐다. 정작 내가 가장 처음 했던 일은 예전에 한번 해지한 다음 이래저래 미뤄둔 실비 보험을 온라인을 통해 다시 가입한 것이었다. 검색하다 보니 질병 분류 상 정신 및 행동장애를 뜻하는 F코드가 뜨면 실비보험 가입이 안된다는 대목이 꽂힌 것이다.


부랴부랴 가입해 놓고 보니 좀 웃펐다. 어쨌거나 의무고지기간이 있을 테니 실비보험에 든 이상 한동안 건강의학과(그러니까 정신과)에 가서 약 처방을 받을 순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혹시 더 큰 병이 생기면 실비 보장은 꼭 받아야겠다 하는 계산이 앞섰다. 이 나이쯤 되면 정신의 건강은 차순위인 걸까. 하긴 실비보험 가입이 건강의학과 진료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면 난 참을 만하다는 이야기잖아, 안심도 됐다. 그렇게 예전에 정신과 질환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병원 문턱을 넘으라고 숱하게 써 제낀 것과는 정반대로 난 최소 의무고지기간인 3개월 정도는 견뎌보자 생각하며 대안을 찾기 시작한다. 관련 책을 몇 권 읽으면서 일종의 자가치료 비슷한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중 일부가 '이 봄, 마음의 백신이 필요하신가요?' 다). 


왜 병원에 안 가고 책이나 보는 거냐..라고 묻는다면 사실 난 문제와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문가도 아닌 네 생각이 맞겠냐고 또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여튼 내가 당사자니까 아주 틀리지는 않겠지. 내가 생각하기엔 난 망했다는 걸, 그것도 철저히 나 본인 때문에 망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 같다. 뭐 해 볼 거다, 아니, 하고 있다, 준비 중이다, 잠깐 쉬어간다, 다음 스탭을 위해 만들어가는 중이다 등 있는 척 잘난 척 떠들어대다가 허허로이 돌아서는 일을 거듭하니 결국 잠재의식이 다리 위에 선 버스 안에서 경고를 내린 것이다. 


뭐 하나 제대로 꾸준히 하지는 않으면서 남들의 성공을 부러워만 하고, 이제는 지나가버린 예전 일을 되새기며 새삼 화를 내고, 저건 내가 더 잘할 텐데 말도 안 된다며 안달을 떨다가 자초한 사단이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 멀쩡한 척 하루 종일 무거운 백팩을 메고 찾는 사람도 없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와중에 내 뇌와 마음은 천천히 조금씩 아파온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훅~ 낚시 바늘에 꿰이듯 걸려 버렸다. 


혼자 남아 피해 갈 길 없이 냉정한 현실을 마주하는 상황과 장소에서 그것이 나타났다. 구립도서관으로 가는 버스 안, 예전 지인들을 만나고 강북으로 향하는 다리 위, 뉘엿뉘엿 어두워지는 스터디카페 앞 정류장... 과거도 현재도 또 미래도 나아질 게 없을 것 같은 생각에 먹먹한 순간, 그것이 왔다. 숨이 가쁘고 어지러워서 빨리 이 곳을 벗어나야 하는데 차는 움직이지 않고, 문은 열리지 않고, 화장실은 안 보인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보다 잘나 보여서 기가 죽는다. 심지어 난 지금 그들 앞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지? 뭐라고 해?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경미한 증상이지만 진지하게 이야기 들어주고 같이 밥 먹고 산책도 해준 친구, 지인들 덕이 최고이고, 몇몇 책에서 얻어들은 뇌과학을 기반으로 한 테크닉들도 도움이 된다. 갑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불안한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면서 신체화 증상이 나타나려고 하면 심호흡을 하면서 숫자를 세거나 음악을 듣거나 멘톨 사탕을 털어 넣는다. 마음먹은 대로 예정했던 정류장에 무사히 내리면 그게 뭐라고 기쁘기까지 하다. 그래도 될 수 있으면 전철을 타고 있다. 


버스를 탈 수 없게 되면서 난 비로소 내 상황을 똑바로 인정하게 되었고, 그제야 스스로를 속이면서 뇌세포에 생채기를 내는 일을 그만둘 수 있었다. 오십 대에 접어들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새롭게 시작한다고 떠들었지만 사실은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예전의 경험을 내세워 다른 사람들의 일을 오만하게 깎아내렸고, 나를 과대평가하면서 세상이 뭔가 잘못된 거라 욕하기도 했다. 뭣도 모르는 건 나였는데... 앞으로도 이런 착각은 끊임없이 계속될 거고 그때마다 새로운 문제에 맞닥뜨리겠지만 그래도 이번 판은 그럭저럭 넘기고 있는 중이다.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참 다양한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네가 최고야!'라는 자신감이 최고의 주문인 것처럼 이번 판에서 나에게는 그게 '인정해! 너는 망했어!'였다. 망한 것도 몰랐을 만큼 대책이 없었으니 지금부터라도 뭔가 또 올 때까지는 이 주문을 외면서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 보려고 한다. 남들 만나서 나에 대해 설명하거나 포장하는 시간에 작은 일이라도 꾸준히 해보기로 했다.(코로나 19가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혹시라도 지금 상황이 나아지길 바라면서 거리를 헤매고, 버스를 타야 하는 분이 있다면 자기만의 주문을 찾으시길. 다른 이들을 의식한 말만 하면서 내게 솔직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마음이 아플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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