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이렇게 읽어도 될까 싶을 때
책 처방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분의 강연을 들은 적 있는데 그의 말로는 평소 책을 안 읽던 사람보다 '나, 책 좀 읽지' 하는 사람 대하는 게 더 힘들었다고 한다. 자기 취향이 분명해서 처방해 준 책들을 어려워하거나 내키지 않아 한다는 것. 무슨 얘기인지 알 것 같다. 나 역시 한국인 평균보다는 더 읽는 편이긴 하지만 스펙트럼은 극히 좁다. 일이나 공부 때문에 헉헉대며 읽는 책들 사이에 평소 좋아하는 책들을 끼워 넣는 식이다. 이렇게 실용 & 취향저격 구도로 지내다 보니 늘 언젠가 읽어봐야지 하는 책들이 빚으로 남는다. 대표적인 분야가 고전.
<독서의 즐거움>은 계속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큰 맘 먹고' 산 책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총 796페이지, 표지 포함해서 두께가 4cm에 달한다.(실제로 자로 재보았음) 과장 좀 섞어서 ‘목침’만한 책이니 혹시 실물을 못 보고 온라인으로 주문했다면 받아보고 놀라지 마시길.(이북 리더 사용자라면 전자책으로 구입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너무 두꺼워 언제 읽나 막막할 수도 있겠지만 그 두께만큼이나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도 무엇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조언이 가득하다. 그래서인지 2010년 초판이 출간되었을 때부터 독서가들에게 잔잔하면서도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대표적인 독서 지침서로 꼽혀왔으며 꼭 10년이 지난 최근 저자가 직접 보완한 개정판이 다시 출간되었다.
저자인 수잔 와이즈 바우어는 초∙중∙고 대부분의 과정을 홈스쿨링으로 이수한 뒤 미국 명문 대학 중 하나인 윌리엄 앤드 메리 대학에 대통령 전액 장학생으로 조기입학했으며 자신의 네 자녀도 홈스쿨링으로 키운 이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라틴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아랍어, 프랑스어 등을 구사하는 인문학자, 다양한 분야의 장서를 폭넓고도 깊이 읽는 다독가, 방대한 지식을 쉽고 직설적인 문체로 풀어쓰는 저술가이면서 어머니로서의 경험까지 녹아든 그의 저서들은 국내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특히 <교양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한 세계 역사 이야기>는 독서교육 분야에서 입소문난 대표적인 스테디셀러로 꼽힌다.
그가 무엇보다 권하고 있는 건 ‘고전 읽기’다. 더 빠른 속도로 일할 때, 더 많이 생산할수록 더 나은 인간이라고 인정받는 사회. 게다가 유튜브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과 틱톡에서 전세계 사람들이 제멋에 겨워 모순된 메시지들을 발신하는 지금에도 고전을 읽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바로 그런 세상이어서 ‘우리의 정신을 발전시키는 것은 저항의 행위를 훨씬 뛰어넘는, 이제 생존을 위한 행위가 되었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가만히 앉아 고전을 읽는 순간,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자신의 성취물에 의해 규정되도록 놔두길 거부하고,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조용한 정신의 발전이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엄선된 고전 목록을 공개하기 전에 우선 1부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를 통해 초보 독자들을 위한 ‘훈련법’을 단계적으로 소개한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훈련법이다. 저자는 ‘사실 독서는 훈련이다’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문이나 잡지, 장르소설을 쉽게 읽어왔기 때문에 별다른 준비 없이도 곧장 호메로스나 헨리 제임스로 파고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러다가 휘청대거나 뒤죽박죽되거나 지치면 스스로 부적합하다고, 양서는 결코 읽을 수 없다고 단념한다는 것이다.
고전을 읽기 위해서는 책을 재미로 읽을 때와는 다른 숙련과정이 필요하다며 저자는 이 책으로 읽고 분석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익히는데 몰두해 보라고 권한다. 그 첫 단계는 스스로 꾸준히 독서에 전념할 30분을 만드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속독 연습과 어휘 공부, 세 번째 단계는 독서 일기 쓰기, 마지막으로 네 번째 단계는 책을 요약하면서 스스로 소화해보는 것이다.
이런 워밍업에 대한 안내를 받고 나면 소설, 자서전, 역사서, 희곡, 시, 과학서 등 여섯 분야 장르별 독서법과 모두 180여 편의 엄선된 고전 목록을 만날 수 있게 된다. 고전이라 하면 몇 세기 전에 쓰여진 옛날 책을 연상하지만 저자는 20세기 책은 물론 이번 개정판에서 21세기에 나온 책들도 덧붙였다. 이번 개정판에 새롭게 추가된 10장 ‘과학서 읽는 법’의 고전 목록을 예로 든다면 기원전 5세기 질병의 본질을 탐구했던 히포크라테스의 <공기, 물, 장소에 대하여>부터 17세기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대화: 천동설과 지동설, 두 체계에 관하여>, 19세기 중반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거쳐 20세기 초 알베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의 특수 이론과 일반 이론>을 거쳐 1962년의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1988년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로까지 연대순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처음부터 분리되지 않았어야 할 두 개의 영역, 즉 역사와 문학을 재결합시키기 위해 가능한 연대순으로 읽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흠, 그래서 넌 다 읽었냐고 한다면... 이 책이 원래 가이드, 지침서의 용도로 나왔기도 하고, 어떤 습관이든 오래 되면 고치기 어려운 것처럼 이미 몸에 배어버린 책 읽기 버릇을 한 번에 떨쳐내기란 쉽지 않다.. 라고 번명해가면서 그때 그때 펼쳐보고 있다. 체급이 헤비해서 책장에서 존재감을 발휘하며 "고전 읽어! 읽으라고!"라고 소리치고 있는 듯. 언젠가는 이 목침(?)을 싹 다 읽고 말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