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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uze May 03. 2020

‘일머리’는 타고나는 거야

노동 대비 최고의 효율을 거두는 김 매니저의 직장생활 노하우

유튜브, 인스타, 텔레그램, 주식투자 앱, 게임 앱을 번갈아 서핑하면서 회사에 출근한다.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으로 휴대폰 화면을 잽싸게 스크롤하다가 낯익은 창 하나가 뜨는 것을 포착한다. 구려서 친구들과는 잘 쓰지 않지만 엄마, 아빠, 할머니를 비롯한 ‘어르신’들과의 소통을 위해 깔아 두고 있는 카카오톡이다. 발신자는 소속팀 직속 상사 이 부장. “오늘 점심 약속 있어?” 5분이면 볼 건데 왜 톡은 보내고 **이야. 순간 짜증이 확 솟구치지만 본능적인 손가락은 이렇게 입력한다. “아뇽 ㅎㅎ”     


“그럼 잘됐네. 12시 갈비탕집 ㅇㅋ?” 다시 “넵ㅎ 좀 있다 봬요”까지 입력하고 확 창을 닫는다. 대책 없는 꼰대. 혼자 밥 먹기 싫어서 아침부터 설레발이야. 하긴 이렇게라도 해두지 않으면 하나둘씩 팀원들이 사라지고 부장만 덩그러니 남는다는 걸 뻔히 알기에 조금은 짠한 느낌도 든다. 그래도 오늘 필은 파스타인데… MSG 듬뿍 들어간 국물을 들이킬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속이 더부룩하다. 한우갈비탕에 스벅 커피까지 벗겨 먹어야지. 같이 먹어주는 게 어디야. 연봉도 훨씬 많이 받으면서…     


“안녕하세요” 하고 들어서니 옆자리 동료가 얼굴을 들었다가 홱 다시 숙인다. 기분이 안 좋은 것 같다. 그러길래 회의석상에서는 말을 아껴야지. 눈치 없이 나대다가 당첨된 주제에. 차장이 쓴 기획서 초안에 이것저것 지적질하다 빚은 대참사였다. 하긴 내막을 몰랐으니 억울할 수도 있겠다. 어제 이른 오후 부장이랑 차장이 커피 마시러 가는 걸 보고 잽싸게 따라붙은 게 신의 한수였다. 뭘 해도 안 먹히는 불황기니 윗선에서 쪼아댔고, 마음 급해진 부장이 차장한테 일단 아무거나 갖고 오라고 해서 소집된 회의였는데… 가뜩이나 짜증 나 있던 차장은 ‘오냐, 그렇게 잘 알면 네가 해봐!’ 하는 심사로 초안 수정 작업을 동료에게 냅다 던진 것이다.


날밤을 새웠을 테니 짜증도 나겠지. 속 넓은 내가 참아주마. 그는 싱긋 웃으며 초콜릿 껍데기, 믹스커피가 눌어붙은 종이컵 등 밤샘 작업의 흔적이 널려있는 동료의 책상에 편의점에서 1+1로 구입한 유산균 음료를 놓아주었다.     


동료의 인사를 들으며 그는 상쾌한 기분으로 PC를 켜고 업무 준비에 돌입한다. 일단 어제 하던 작업 파일을 큰 화면으로 펼쳐 놓고 사이드바에 즐겨 찾는 사이트들을 정렬한다. 그중 오늘은 네가 당첨이다. 구직 사이트! 직무 분야와 경력, 기업 형태, 우대 조건 등 사전 설정해 놓은 맞춤형 조건에 따라 떠오른 구인정보들을 재빠르게 훑는다. 가만, 이거 그 사람이 다니는 회사인 듯? 지난 주말 자전거 라이딩할 때 만난 지인의 지인이 떠오른다. 마침 잘 됐네. 공고를 좀 더 보고 나중에 메시지를 보내 보기로 한다. 다음에는 뭘 볼까?     


윗선에서 급 소집한 회의 때문에 다른 일들이 차순위로 밀려서 회의 관련자들(엄밀히 말하면 옆자리 동료) 외에 그를 비롯한 다른 팀원들은 뜻밖에 여유로운 오전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11시를 넘기니 눈치싸움이 시작된다. 오늘 회의 준비에 바쁜 옆 동료는 책상 앞에서 대충 때울 거고, 늘 독자노선을 걷고 있는 아웃사이더들은 서둘러 충전기와 아이패드를 챙겨 카페나 도서관, 요가 스튜디오 등으로 사라질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이 부장의 점심 수발에 골치를 앓는데 주로 그가 커버하기 때문에 고맙다는 인사를 많이 받는다. 개인 약속도 못 잡고 괴롭다고 엄살을 떨지만 사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얼굴 도장 찍어가며 밥 공짜로 먹으니 좋고, 덤으로 중요한 정보들도 들을 수 있다. 윗사람들 관찰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어떻게 해서 살아남았는지, 또 뭘 하다가 물을 먹게 됐는지 생생하게 듣고 보면서 참고할 수 있다. 결혼, 출산, 주식, 부동산 등 다방면에서 앞으로 갈 길과 가서는 안 될 길도 가리게 된다.     

 

애 둘을 키우고 있는 부장의 교육비 하소연에 ‘그래도 서울시내 아파트 하나는 건졌잖아’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 갈비탕을 흡입하고 있는데 회의 준비가 화제로 떠올랐다.

“네, **씨가 정리 중인 것 같아요.”

“오늘 팀 회의야 그렇다 치고 내일 오후 본부장님 발표가 문젠데. 뭐라도 힘을 줘야 될 텐데 말이야.”

“아, 그렇지 않아도 제가 찾아본 게 있는데요.”     


수저를 내려놓고 유튜브 영상을 몇 개 보여준다. 이런 걸 또 언제 찾았냐며 기특해하는 부장에게 내친김에 노션으로 만든 템플릿도 슬쩍 보여준다. 지메일 캘린더 기능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트렌드라면 환장을 하는 부장은 생판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하는 데 도가 튼 사람이다. 지금도 별 것 아니네 하는 표정이지만 돌아가자마자 마구 검색을 해 본 다음 팀원들 앞에서 그럴듯하게 썰을 풀겠지. 혹시 실제로 증명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해도 걱정할 건 없다. 그한테 몰래 부탁해서 해결할 테니까.    

 

부장이 사 준 커피를 홀짝이며 들어간 팀 회의에서 그의 짐작은 들어맞았다. 프린트로 출력된 기획안을 뒤적거리며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흘낏거리던 부장은 본격적으로 포문을 열기 시작한다. “맨날 보는 파워포인트 화면. 나도 지겹네. 영상자료라도 좀 많이 보여주던가 하지, 지루해서 집중들 하겠어?”

자료를 준비한 동료와 차장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진다. ‘찾을 시간이나 줬어?’ 물어보고 싶은 표정이다.     

부장은 선심이나 베풀 듯 자기가 괜찮은 영상자료는 좀 찾아놨으니 최종 작업할 때 보태라고 말한다. 아까 보여주면서 이미 그가 잽싸게 링크를 보내주었다. 다시 2차 잘난 척이 시작된다. “이번에는 파워포인트 말고 노션으로 보여주자. 화려하진 않아도 요새 많이들 쓴다니까 신선한 맛에 좀 넘어가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건 또 뭐야.’ 차장의 얼굴에 짜증이 서리고, 작업을 맡았던 동료는 당황한다. 금세 시원스러운 대답이 나오지 않자 부장이 재차 말한다. “뭐야, 노션 힘들어? 당장 내일 오후가 회의인데. 잘 쓰는 사람?”     


그가 내키지 않는 듯 목을 움츠리면서 손을 들자 차장이 정리한다. “그럼, **씨. 지금 회의 논의까지 반영한 수정본 퇴근 시간 전까지 @@씨에게 넘겨. @@씨는 그거 내일 오전 중까지 만들어서 부장님 컨펌하실 수 있게 보내주고.” 이어 본부장 보고 때 발표는 차장이 하고 그가 보조 역할을 하는 것까지 결정된 다음 회의가 끝난다.     

회의실을 나가자마자 휑하니 바람을 쐬고 온 옆자리 동료는 무서운 기세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마우스를 클릭해댄다. 어차피 자기 손을 떠난 바에야 빨리 마무리 짓고 칼퇴하겠다, 옥상에서 마음을 정리하고 온 것 같다. 퇴근 시간 1시간 전에 수정본이 전 팀원에게 공유되었고, 부장과 차장이 이리저리 사족을 단 다음 1차 최종본이 완성되었다. 6시가 되자마자 옆 동료는 벌떡 일어나 말 한마디 없이 사무실을 빠져나갔고, 그 뒷모습에 대고 차장이 혀를 끌끌 찬다. 나머지 사람들도 미적미적 눈치를 보며 짐을 챙긴다. 부장은 일부러 그의 자리로 와 어깨를 두드린 뒤 퇴근한다. 마지막으로 차장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씨, 갑자기 미안한데 고생 좀 해. 그리고… 내일 발표 때 눈치껏 좀 잘 도와주고.”     


걱정하지 마시라며 차장을 보내고 그는 사무실에 홀로 남았다. 오늘 오랜만에 야근 수당을 받을 수 있겠네. 사실 내용은 다 나와 있으니 시간은 충분하지만, 그는 알바로 받아놓은 일도 처리하면서 늦게까지 있을 생각이다. 메일은 내일 10시쯤 피곤해 하면서 보내야지. 일단 워밍업 좀 하다 시작할까. 막 휴대폰을 집어 든 순간 진동음이 울린다. 친구다. “어, 웬일이야? 나? 아직 회사. 그러게. 오늘 야근각. 그래, 내가 회사일 다 한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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