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 타령은 하수나 하는 거지
올해는 조직에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본부장님의 복심
2020년이 되었다고 제야의 종 치던 때가 언제 같은데 벌써 또 설이네. 이번 설 연휴는 주말을 끼고 있어 지난해보다 그나마 짧은데, 그게 아쉬웠는지 몇몇 사원들이 연차 붙여서 일주일 가까이 장기 휴가를 떠났다. 휴가원 결재는 부서장 전결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미리 알았다면 차장, 부장들 통해 한 마디 했을 텐데... 드문드문 이 빠진 것처럼 비어서 연휴도 되기 전에 들뜬 분위기가 되어버린 사무실을 보며 그는 생각한다.
이제 언제 그만 둬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인데 그래도 한 해 한 해 잘 버티고 있구나. 업계 변화를 놓치지 않고 캐치하면서 중심을 잡고 가는 자기 역량이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살짝 기분이 좋아진다. 같이 입사한 동기들이 대리, 과장, 차장, 부장 등 직급 순으로 도사린 허들을 넘지 못하고 짐을 쌌을 때도 그는 살아남았다. 심지어 IMF로 윗 선임들이 정리되면서 숨통이 트여 고속승진도 경험해 보았다. 지금도 제4차산업혁명부터 빅데이터까지 새로운 트렌드는 젊은 사원 못지 않게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조찬 먹으며 자문도 받고 경영대학원 강의에 독서까지 자기계발에 부지런을 떨어서 이론은 빠삭하고, 인스타그램은 좀 그렇지만 페이스북은 심심찮게 올린다. 그뿐이랴. 한글에 워드, 엑셀은 물론 파워포인트까지는 직원들 신세 지지 않을 정도다.
생물학적인 나이야 빼도박도 못하는 386이지만 이 세대를 둘러싼 꼰대론은 자기와 별로 상관 없다고 느끼는 것도 그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조직 내에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대외적으로 나가는 일 하나 하나 꼼꼼히 챙기느라 그의 하루가 참 바쁘다. 부장부터 평사원까지 다들 한 달 한 달 월급만 받는데만 급급해서 올라오는 기획안마다 실망스럽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새 애들은 야망이 없나? 회사에 충성은 바라지도 않지만 자기 일도 남의 일 하듯 건성건성. 그래서 어디 스카우트 제의나 받겠나. 하긴 그래서 그런가. 요새 오래 다니는 직원들이 늘었다. 이직률 낮으면 좋은 거 아니냐 하겠지만 천만의 말씀. 1년만 넘어가도 어느덧 군기가 확 풀어져서 시간외 수당 달라, 육아휴직 하겠다, 탄력근무제는 안되냐 말들이 많아진다.
비전 없는 직원들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늘 웃는 상이던 얼굴이 구겨진다. 사실 그의 생각이 자꾸 유쾌하지 않은 방향으로 돌아가는 건 설 연휴 끝나고 계획되어 있는 사업단 회의 때문이기도 하다. 회사 내 사업단 본부장들이 다 모여 한 해 계획을 점검하는 회의인데 작년 실적도 나쁘지 않고, 올해 사업 기획안도 무리없이 통과해서 별 걱정은 안 되지만 그래도 오너가 물어봤을 때 덧붙일 만한 추가의 '한 방'이 필요하다. 뭐가 좋을까?
갑자기 최근 사들인 경영학 책 제목이 떠오른다. 애자일인가 뭔가 그랬는데 책 소개랑 서문만 잠깐 읽었다. 전 직원을 작은 팀으로 쪼개서 개별 프로젝트를 하게 한다던가 하는... 넷플릭스랑 구글 같이 유명한 기업들도 채택한다는 부분을 보면서 어디 써먹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메모해 놓았다. 어디 보자. '민첩하게 변화를 감지하고 유연하게 혁신하는 조직'이라고 써놓았군. 이거 좋겠다. 회의 때 필요하면 이걸 좀 인용하면서 내부 조직을 좀 개편해보겠다고 하는 거야.
처음에는 그냥 그럴 듯한 대답 수준 정도 준비할 생각이었는데 무심코 떠올린 아이디어 치고는 괜찮다 싶어 어느덧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보는 그였다. 전체적으로 아예 소팀제로 만들면 어떨까. 어차피 부장, 차장들 제 구실도 못하고 내 선까지 올라오게 만드는데 이 참에 다 팀장 하라고 하지 뭐. 팀장이 직위도 아니고 연봉 깎는 것도 아니고.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조직 만들기라면 누가 뭐랄거야. 그래봤자 나이들도 많고 연봉도 만만찮아서 나갈 생각도 못할 거야. 나가면 또 좋지 뭐. 비용절감도 되고. 요새 밀레니얼 세대가 대세라는데 우리 회사엔 70, 80년대 생들도 너무 많아. 특히 그 최부장. 존재감도 없이 10년을 다니다니 세상이 만만한 줄 아나.
그래도 소팀제로 다 쪼개면 일일이 컨펌하기 좀 힘들라나. 자기 노동강도를 생각하니 좀 주춤했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조직개편이라는 게 그래도 1년에 한 번은 있어줘야 느슨한 분위기에 자극을 줄 것이다. 대신 자신과 각 팀장들 사이에 중간 역할을 해줄 총괄팀장 한 자리를 배치한다는 묘수를 생각해낸다. 그것도 젊은 조직을 만들겠다는 조직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차장 중에서도 신참 축인 정차장을 떠올려본다. 분위기도 잘 맞추고 일에도 욕심이 많아서 개중 마음에 드는 친구다. 이 정도 혁신이면 요새 20대 젊은 사원들도 만족하겠지. 좋았어!
내친 김에 조직개편 계획을 밀어붙이기로 결심한 그는 연휴 동안 좀 더 생각해보기로 다짐한다. 아예 전체회의를 소집해 전 직원 앞에서 계획을 발표할 요량이다. 일단 연휴 전에 정차장만 따로 불러서 언질을 주고 안을 좀 만들어보라고 해야겠다. 하는 거 봐서 시원찮으면 전체 팀을 1국, 2국으로 나눠서 총괄팀장을 한 명 더 뽑지 뭐. 지들끼리 경쟁하면 긴장감도 생기고.
잠깐. 전 직원이 볼 테니 프레젠테이션은 좀 번듯해야 할 텐데 초안 나오면 아예 디자인을 시킬까. 마침 글도 쓰고 디자인에 영상까지 만들 줄 아는 인턴이 들어와 돈 굳게 생겼다고 인사부장이 반색하던 기억이 났다. 정차장한테 그 친구 쓰라고 해야겠구만. 인턴이면 소문 안 내고 열심히 하겠지.
설 연휴 동안 각종 집안 대소사 및 가족의 요구로부터 보호해 줄 합법적인 '회사 일'이 생긴 것에 기뻐하며 그는 시계를 본다. 12시 25분이다. 조찬 먹고 와서 그닥 배가 고프지 않아 점심 시간이 지난 것도 잊고 있었다. 아마 최부장 포함 세 명의 부장들은 외부 약속이 없는 오늘 그의 점심 파트너를 해주기 위해 대기 중일 것이다. 슬슬 나가서 밥이나 먹어볼까. 아침에 느끼한 걸 먹었으니 점심은 뼈해장국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