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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uze Sep 19. 2019

여덟 개의 사무실  슬리퍼와 함께한 사람  

실무자 여러분, 주위에 이런 동료 하나쯤은 있죠?

지인들과의 이야기 끝에 누군가의 모습이 계속 맴돈다. 특정한 사람을 지칭하는 건 아니고, 지금까지 만나고, 봐왔던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진 어떤 집합체 같은 것. 속절없이 놀고 있는 내 주제에도 소속이 있고, 매달 월급을 받는다는 것 만으로는 부럽지 않은 그의 '지속가능한' 모습.(그쪽에서는 날 불쌍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는 직장에 다닌다. 4대 보험에 국민연금도 내고 있다. 자기 나이에 취직을 못하거나 퇴사 후 재취업을 하지 못한 친구들이 주변에 많기 때문에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한테는 늘 회사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한다. 늘 같이 점심을 먹는 동료들과도 거침없이 뒷담화를 쏟아낸다. 틈만 나면 퇴사 관련 콘텐츠를 섭렵하며 사표를 내는 그 순간을 시뮬레이션해 볼 때도 있다. "저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러나 현재 놀고 있는 예전 동료들을 보면 왠지 칙칙하고 구린 느낌이라서 속으로는 드라마 <미생>의 대사를 되뇌며 끝까지 버텨야지 다짐한다. '회사가 전쟁터라고? 밖은 지옥이다.'


하고 있는 일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흥미로운 일은 더 뒤에 들어온 팀 동료가 가져갔다. 동료는 경력직으로 입사했는데, 정확치는 않지만 신입으로 입사한 그보다 연봉이 훨씬 세다는 소문이다. 나도 연봉협상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한번 나갔다 들어올 수도 없고... 몇 년째 연봉은 물가상승률만 겨우 반영해 아주 조금씩만 오르고 있다. 동료를 볼 때마다 입맛이 쓰지만 직속 상사는 물론 보스한테까지 짧은 시간 신임을 얻은 상황이라 대놓고 무시하기가 쉽지 않다. 그냥 잘해주는 게 나을 것... 아니 잘해주는 게 사실 이롭다.


팀 회의를 하면 마음이 불안하다. 뭔가 영양가 있는 아이디어를 꺼내 놓아야 할 것 같은데 떠오르질 않는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나도 주목을 받았는데, 면접 때 톡톡 튀어서 기대가 많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그럼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 뉴페이스한테만 잘해주는 이따위 풍토, 마음에 안 든다. 나한테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든다.


이 직장에서 그는 나름대로 고참이다. 자리를 잡지 못하고 삐걱일 때 들어와서 '와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받았던 자타칭 창립멤버다. 그 후 자리를 잡고 어느덧 확장하게 된 과정까지 지켜보며 대표를 포함해 적지 않은 동료들을 앞세워 보냈다. 지금 대표는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 돌아가는 사정을 모른다. 저번에 처리한 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여긴 예전부터 이렇게 해왔는데, 그래야 순조롭게 돌아가는데 그걸 모른다. 걸핏하면 회의 소집해서 브레인스토밍 하자 그러고, 분기별로 계획 세우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 연초에 비전 워크숍 한 번 떠들썩하게 하면 충분하지 않나. 그는 아직도 파일 수정에 여념이 없는 동료들을 딱하게 여기며 몇 년 전 파일을 조금 바꿔서 손질한 기획안 출력물을 가볍게 달랑거리며 회의실에 들어선다.


출력물을 배부하고 흐른 잠깐의 정적. 팀장이 한 마디 한다. "이 안은 2017년 **프로젝트 기획안과 비슷한데요?" 제길슨. 팀장은 올해 입사해서 모를 줄 알았는데 예전 자료를 뒤져본 모양이다. 그는 어떻게든 모면해 보려고 애쓴다. "아, 아무래도 시기나 콘셉트가 비슷하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사실 뭐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어딨겠어요? 하.하.하." 뱉어놓고 보니 스스로 들어봐도 완전 구리다. 살짝 경직되는 분위기 가운데서도 몇몇 동료들의 얼굴에 슬쩍 웃음기가 스친다. 이후 각종 국내외 사례 소개에 이은 메인 콘셉트, 세부 실행계획과 일정표, 홍보물 시안까지 갖춘 다른 동료의 프레젠테이션이 진행되는 내내 그는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프로젝트 담당자가 결정된 후 회의는 끝났다. 자리로 돌아온 그는 같은 시기 입사해 이제 한 명 남은 동료에게 카톡을 보낸다. "**씨가 하게 됐어, 그거." "그래? 좀 큰 건데 아쉽겠네?" 잠시 톡을 들여다보던 그는 다시 입력한다. "뭘. 일만 많아지지 뭐. 그 프로젝트 노가다 빼박임." "그렇긴 하지. **씨야 워낙 일 욕심이 많으니까." "글게. 돈 더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나 모르겠음" "냅둬. 사서 하는 고생."


톡을 주고받다 보니 좀 마음이 풀린다. 내친김에 11시 30분에 단골 중국집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톡을 끝냈다. 그래, 사서 하는 고생. **씨도 이런저런 애를 쓰다가 그만두겠지. 비전이 없다던가 회사가 개인 성장을 지원해주지 않는다던가 하면서. 난리치고 있는 팀장도 언젠가는 지쳐서 나갈 것이다. 그러고 나면 이 난리통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이 역시 조직의 버팀목이란 사실이 '또' 증명될 것이다. 오늘 회의 때문에 좀 신경을 썼더니 좀 머리가 아프단 사실을 깨달은 그는 내일 오후에는 병가를 내야겠다 생각한다. 아, 그전에 사내 동호회 신청서 내고 가야지. 이번에는 자전거로 해볼까? 아님 미식 동호회?  


고추잡채밥과 삼선짬뽕을 놓고 마주 앉은 입사동기의 얼굴이 좀 심상찮다. 얘기를 듣자니 요새 돌아가는 형편이 예사롭지 않다고 한다. 사업 파트를 좀 정리해서 원가를 절감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단다. 해고하면 골치가 아프니까 분위기만 조성해서 알아서 나가게 할 속셈인 것 같다는 추측. 순간 흠칫했지만 그보다 연봉이 센 동료, 팀장부터 나이까지 많은 부서장, 임원들의 얼굴이 스치면서 안도감이 든다. "뭐, 윗급부터 자르겠지." "아니야. 전반적인 조정이라 매니저급들도 안심 못해."


이런 젠장. 갑자기 밥맛이 떨어진다. 이 나이에 구직하려면 골치 아파지는데. 요새는 경력직이라 해도 인적성검사,  NCS, 영어성적 제출까지 팍팍하다. 그런 공부 담쌓은 지 너무 오래됐다. 인상을 찌푸리며 한 술 퍼올린 고추잡채밥이 맛있다. 불맛이 확 느껴지면서 아삭아삭하게 볶아진 피망과 양파의 식감. 쫀득하고 감칠맛 나는 돼지고기는 또 어떻고. 일단 배는 채우자 싶어 몇 숟가락 더 먹다 보니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다. 그래, 분위기 흉흉하면 일 욕심 많은 것들이 먼저 나가겠지. 걔네들은 갈 데도 많을 거야. 쓸데없이 나대지 말고 난 가만있자. 아, 다음 워크숍 때는 잡일이나  거들어서 존재감은 좀 보여야겠다.


커피 테이크아웃해서 가는 길에 다이소나 들러야겠다고 그는 생각한다. 사무실에서 신는 슬리퍼가 너무 낡아서 바꾸려던 참이었다.

 

이번에도 잘 지나갈 거야. 예전에 늘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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