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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uze Apr 30. 2020

시골빵집의 식빵에 담긴 서사

와타나베 이타루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더숲 | 2014

밥이 주식인 나라에서 빵은 입맛대로 즐기는 식도락의 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그 빵을 내세우며 골목마다 포진한 수많은 빵집은 크나 작으나 모두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창업한 가게만큼 폐업도 많은 소상공인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컵케이크, 대만 샌드위치, 마카롱, 수제식빵 등 갖가지 아이템들이 등장했다 금세 사그라든다. 작은 동네 빵집을 우선 살려야 하는 거 아니냐 말들 하지만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에도 전 재산을 투자한 어떤 가족의 꿈이 실려 있다 보니 가끔은 입맛대로 골라잡을 빵 종류가 많다고, ‘빵 투어’ 할 맛 난다고 무턱대고 좋아할 일인가 싶다. 10미터마다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이 있으니 생활이 참 편리하다고만 하기엔 입맛이 개운치 않은 것처럼.       


무한경쟁 시대에 돌입한 소상공인의 대표적 업종 빵집. 이를 둘러싼 일들을 곱씹어 볼 때 한 괴짜 빵집 주인의 이야기를 한 번 읽어볼 만하다. 2008년 도쿄 인근 지바현에서 시작해 2011년 오카야마현, 지금은 돗토리현에 자리를 잡았다는 작은 시골빵집 ‘다루마리’의 주인 겸 제빵사 와타나베 이타루가 지은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라는 책이다.   


사업하겠다는 사람이라면 주류경제학을 봐야지 웬 마르크스? 그의 독특한 이력을 보면 좀 이해가 간다. 저자는 고등학교 졸업한 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7년 정도 편의점이나 이삿짐센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프리타로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진로를 수정하게 된 것은 23세 때 안식년을 맞은 교수인 아버지를 따라 헝가리로 가서 1년간 생활하면서부터. 식문화가 풍성한 헝가리에서 신선하고 소박한 요리에 농가에서 담근 와인 등을 즐기다 돌아가 보니 평소 마시던 캔커피가 ‘갈색 물감’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이때부터 먹거리에 관심을 느껴 뒤늦게 농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막연히 농부를 꿈꾸던 그는 졸업하고 서른이 넘어 유기농산물 도매회사에 취직했지만 원산지 허위표기, 뒷돈 거래 같은 부정에 염증이 내고 1년 만에 퇴사한다. 그나마 큰 수확은 평생 뜻을 같이 하는 동반자인 아내 마리코를 만났다는 것.(빵집 이름 다루마리도 두 사람의 이름을 합친 것이다) 환경문제, 먹거리 안전 등에 관심이 많은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시골에 둘만의 가게를 열기로 한다. 4년 반 동안 네 군데의 빵집을 돌아다니며 힘든 도제식 수련을 거친 뒤 개업을 눈앞에 둔 시점이 2008년. 하필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많은 이들이 집에서 쫓겨나고 실직하는 와중이었다. 투기세력이 상품시장으로 몰려들어 곡물 가격이 폭등, 그 여파로 작은 빵집 ‘다루마리’ 역시 실의에 빠졌다.      


나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 부정이 판을 치는 세태가 싫어 회사에 사표를 낸 사람이다. 바깥세상으로 탈출하려고 제빵기술을 배웠지만, 바깥세상이어야 할 빵집 공방마저 경제 시스템의 한가운데놓여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p34      


고민에 빠진 그에게 <자본론>을 읽어보라는 조언을 건넨 것은 저자의 아버지. 그는 마르크스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비주류 경제학자였다. 서점에 가서야 새로 번역된 <자본론>이 총 13권짜리 대작이라는 사실을 생전 처음 알았다는 그는 수백 년 전 독일 경제학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앞으로의 방향을 잡기 시작한다.   

   

 <자본론>이 시골빵집 주인에게 던진 메시지는?


처음 가슴을 울린 것은 새벽 2시에 출근해 점심시간도, 휴식시간도 없이 꼬박 서서 15시간을 일해야 했던 수련 시절의 경험이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묘사한 그 시대 빵집 상황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세월이 지났지만 노동자와 서민에게 강요되는 가혹한 환경은 변하지 않았다.


저자는 질문한다. “그 어디에도 부정은 없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 자본가는 가격대로 노동력을 샀고,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할 뿐. 그렇다면 애당초 노동력이 상품이 된 것일까?”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마르크스는 노동력이 상품이 되려면 두 가지 중요한 조건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하나는 노동자가 ‘자유로운’ 신분일 것.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비로소 자신의 노동력을 타인에게 팔 수 있다. 또 하나는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 생산수단이란 기계나 원재료 등 상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노동력 이외의 것들을 말한다. 노동자가 자기 소유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으면 스스로 상품을 만들어 팔 수 있다. 그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고, 그래서 사용당하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자신의 노동력을 떼어 팔기 싫다면 자기 소유의 생산수단을 가지면 된다. 그 점을 깨달은 나는 제빵 기술을 익혀 내 가게를 열고, 생산수단인 믹서와 오븐 등의 기계를 갖추었다. 또 가급적 근처 농가에서 재료를 구입하여 불안정한 시장에 좌우되지 않고 재료를 구하는 방법을 실천했다.” p52     


제빵에 적합한 효모를 골라내 인공적으로 배양한 이스트가 나오면서 더 낮은 가격에 더 많은 빵을 만들게 되었지만 왜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가에 대한 대답도 얻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기술혁신은 결코 노동자를 풍족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자본이 노동자를 지배하고 보다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기술혁신 후 상품 가격은 내려가는 게 맞겠지만 어떤 조건 하에서는 기술혁신 후에도 그 이전과 같은 가격으로 상품을 팔 수 있다고 한다. 새로 개발된 기술을 한정된 특정 자본가만 사용하면 된다는 것.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 속에서 이윤은 기술혁신 전의 수준으로 돌아간다.      


그래도 상품의 가격이 떨어진다면 노동자들에게는 즐거운 소식 아닐까. 임금은 안 올라도 싼 값으로 물건을 구입할 수 있으니까.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것 또한 아니다. 노동력의 교환가치, 즉 임금이 생활비와 기술습득비용, 자녀 양육비의 합계액을 기준으로 정해졌을 때 상품의 가격이 싸지면 생활비와 양육비(경우에 따라서는 기술습득비용까지) 모두 낮아진다. 그 결과 노동력의 교환가치가 떨어지는 결과가 나타난다. 상품의 가격이 떨어짐으로써 돌고 돌아 임금까지 떨어지는 것.      


뿐만 아니라 기술 혁신은 대부분의 경우 노동을 단순하고 쉽게 만드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또한 노동력의 교환가치(임금)를 떨어뜨리는 원인. 노동이 단순해지면 노동자가 기술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러면 각자의 기술습득비용이 굳는 만큼 임금도 낮아진다. 무엇보다 단순한 노동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전락해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게 된다. 이 부분을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노동자는 기계의 부속물로 전락하고, 부속물로써의 그에게는 오직 가장 단순하고 가장 단조로우며 가장 손쉽게 획득할 수 있는 기술만이 요구된다.” (공산당 선언)      


이스트를 사용해 누구라도 쉽게 빵을 만들 수 있게 되니 빵값이 싸지고, 빵집 노동자는 싼값으로 계속 혹사당하게 되는 상황. 또 공방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은 단순해져서 아무리 오래 일해도 고유의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 저자는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엄선한 재료를 사용해 정성과 수고를 들여 빵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정당한 가격을 매겨야 하며 제빵사는 본인의 기술을 살린 빵을 지속적으로 만들 수 있도록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자본론>을 통해 얻은 통찰을 빵집 주인답게 자연계에 있는 물질이라면 모두 언제나는 겪어야 하는 두 가지 현상, 발효와 부패로 설명한다. 우선 재료가 사람의 생명을 키우는 힘을 갖추고 있으면 균은 빵이나 와인처럼 맛있는 음식으로 이를 변화시킨다고 한다. 바로 발효 작용이다. 반면 생명을 키우는 힘이 없는 재료라면 균은 무참한 모습으로 변화시켜 안 먹는 게 좋겠다는 신호를 사람에게 보낸다. 이게 부패 작용이다.


발효와 부패는 모두 자연계에 존재하는 물질이 균의 작용을 통해 자연 속으로 편입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이스트처럼 인공적으로 배양된 균, 각종 첨가물과 농약 등이 자연의 섭리에 반해 패하지 않는 음식을 만들어낸다.      


이 같은 부패하지 않는 음식이 먹거리의 가격을 낮추고 일자리를 값싸게 만든다. 싸구려 먹거리는 나아가 먹거리의 안전을 희생시키고 사용가치를 위장함으로써 먹거리를 만드는 사람에게 귀속되어야 할 기술과 존엄을 빼앗아간다.” p80     


그는 이러한 시각을 전체 경제로까지 확장시킨다. 시간에 의한 변화의 섭리로부터 벗어나 있는 또 하나의 것, 바로 돈이다. 돈 역시 부패는커녕 오히려 투자를 통해 얻는 이윤과 대금업을 통해 발생하는 이자로 인해 끝없이 불어난다. 적자국채를 발행하고, 금리를 낮추고,  양적 완화를 통해 마구 풀어 시중에 돈이 넘쳐나는 지금도 불황이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부패하지 않는’ 돈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낳는 주범이라면 차라리 돈과 경제를 ‘부패하게’ 만들어버리면 어떨까?”라는 게 저자의 발상. 발효의 힘을 빌려 발효와 부패 사이에서 빵을 만드는 자신에게 딱 맞아떨어지는 발상이 아닐까 말한다.      


번화한 도심지의 빵집과 동네 빵집을 거치면서 나는 부패하지 않는 돈을 탄생시킨 자본주의의 모순을, 뼛속 깊이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속속들이 눈으로 보는 사이에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이 선명해졌다. 이 사람들이 하는 것과 정반대로만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시골빵집을 내기 위한 크나큰 양식이 된 것이다.” p84     


지금도 독특한 철학으로 운영되고 있는 빵집 '다루마리'(사이트에서 캡처)

'다루마리' 사이트 링크


이 결과 그와 아내의 빵집 ‘다루마리’는 ‘부패하는 경제’를 지향하며 꾸려나간다. 핵심 키워드는 발효, 순환, 이윤 남기지 않기, 빵과 사람 키우기라고 한다. 대표 메뉴인 일본 식빵은 고택에 붙어사는 천연균과 지역 농부가 자연 재배한 작물의 합작품이다. 자가제분한 호밀로 번식시킨 호밀 효모, 역시 자가제분한 밀의 전립분에서 얻어낸 통일효모, 유기농 건포도를 1주일 정도 물에 담가 만드는 건포도 효모, 보리맥아와 호프로 번식시킨 맥주효모… 천연 누룩균을 채취할 때는 자연재배한 밀에 인근 젊은 전통 죽세공 장인이 만든 대소꾸리를 사용한다. 물은 원천수가 샘솟는 산속에서 길어온다. 지금도 문제가 생기면 오로지 균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인다는 저자는 설탕, 버터, 우유, 계란도 빼고 쌀이나 밀의 잠재능력을 끌어내 자연적인 감칠맛을 낸다.      


수백 년 넘게 역사를 지켜가는 일본술 양조장, 염색, 직물, 가죽 등 다양한 분야 공예 장인들, 무비료, 무농약 자연재배를 고집하는 젊은 농부들, 좋은 재료의 요리를 선보이는 셰프 등 추구하는 바가 같은 이들과 연계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소상공인이라면 사회적 생산과 노동자 자신의 자유로운 개성을 두루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 저자는  소비자에게 빵에 포함된 가치를 부당하게 부풀리거나 깎아내리지 않으면서 누가 어떻게 만들었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정중하고 공손하게 전한다고 말한다. 상품 하나하나 정성껏 만들고 교환가치를 높게 유지해야 소상공인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의 흐름을 직원들에게 공개하고 주 4일 영업에 연중 한 달은 정기 휴가를 떠나는 경영방식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는 지금보다 빵을 더 잘 만들기 위해서는 빵을 안 만드는 시간 역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윤을 내지 않겠다는 것은 그 누구도 착취하지 않겠다는 의미, 즉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겠다는 의미다. 우리는 종업원, 생산자, 자연, 소비자 그 누구도 착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돈을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올바르게 쓰고, 상품을 정당하게 비싼가격에 팔 것이다. 착취 없는 경영이야말로 돈이 새끼를 치지 않는 부패하는 경제를 만들 수 있다.” p196       


빵 하나를 이렇게까지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은 부부가 먹기를 참 좋아하기 때문이라며 먹고 싶은 것을 지키고 싶었고, 생활과 일이 하나가 된 인생을 살고 싶어서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저자. 과연 그들처럼 할 수 있을까. 열이 창업하면 아홉이 1년 만에 폐업하는 시대. 그러나 오늘도 누군가는 가게 문을 열고 있는 상황은 다들 그들처럼 ‘생활과 일이 하나가 된 인생’을 원하기 때문이겠지만 과연 이 고지식한 길을 따라갈 수 있을까. 저자는 답한다.       


지금 같은 글로벌한 자본주의 일변도 세계에서는 실현하기 어려워 보일 수도 있다.(중략) 우리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미래를 향해 한 걸음 내닫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가능하다면 시골에서 우리처럼 도전하는 사람들이 늘면 더 좋겠다. 꼭 그 길이 아니어도 자기 안에 있는 힘을 키우고, 땅과 터를 다지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늘면 좋겠다.” p232     


그는 매일 돈을 쓰는 법을 바꿔보는 것도 ‘부패하는 경제’를 만드는 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몇 년에 한 번 있는 선거의 한 표보다 매일 쓰는 돈이 현실을 움직이는데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믿을 수 있는 물건을 만들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정당하게 비싼 값을 지불하는 것 역시 이중 하나다. 이윤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환경을 조성하고 흙을 만드는 사람에게 돈을 쓰는 것. 결국 ‘돈을 쓰는 방식이어야 말로 사회를 만든다’는 이야기가 울림을 준다.      


장기화되는 코로나19 사태에서 가장 먼저 희생된 것도 소상공인이었다. 장인은 이미 예전에 자취를 감추었다. 비대화되는 도시의 그늘에서 지역은 살지도, 죽지도 못한다. 비록 작은 시골 빵집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서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뤄 순환되는 소우주를 가꿔낸 사람의 이야기는 그나마 몸을 살리는 먹거리, 빵에서 시작했기에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우리 주변에도 ‘사람과 균과 작물의 생명이 넉넉하게 자라고 잠재능력이 충분히 발휘되는 경제’가 되살아나기를.


*이 리뷰는 반디앤루니스 서평단  '펜벗' 10기 활동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다른 펜벗들의 리뷰도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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