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연애편지에 대한 이야기다. 연애편지를 받아본 적이 있거나, 써 본 적이 있다면 공감할 수도 있는.
휴학생 시절, 학과 생활 때문에 개설해놓기만 했던 내 페이스북을 몇 개월 만에 들어갔다가 메세지가 도착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꽤 오래전에 온 것이었는데 발신자가 매우 뜻밖이었다. 바로 나에게 첫 실연의 상처를 준 ‘구남친’ 이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내 뇌가 고민을 시작하기도 전에 본능에 충실한 손가락이 딸깍 하고 그것을 눌렀다. 그리고 나는 스크롤을 몇 번을 내려도 끝이 없는 장문의 편지와 마주하게 되었다.
ㅇㅇ아, 나 ㅇㅇ야. 내 이름을 잊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너무 구질구질해서 중간 모두 생략) 너를 꼭 만나고 싶어. 이제야 깨달았지만 내 첫사랑은 너인 것 같아.
첫번째로 든 생각은, 이거 완전히 또라인가? 두번째로 든 생각은, 그래도 제법 절실하게 썼는데? 세번째로 든 생각은, 시간도 남아도는데 만나나 볼까? 였다. 빠르게 전개하자면, 결국 나는 답장을 했다.
우리의 만남은 종로의 한 곱창집에서 성사되었다. 조용한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할 수도 있었겠지만, 훌륭한 알콜 중독자로 살아가고 있던 당시의 나는 곱창에 쏘맥이 땡겼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는 그 친구와 술자리를 가져보고 싶기도 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연애라는 걸 했을 때 나는 술은 꿈도 못 꿀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당당하게 음주를 할 수 있는 성인으로 성장한 나는 모둠곱창 한 개, 카스 한 개, 처음처럼 한 개를 시켰다. 그 친구는 열심히 곱창을 굽고, 나는 열심히 쏘맥을 말았다.
나누는 이야기는 참으로 시덥잖았다. 대학을 간 뒤 어떤 삶을 지내는지, 전공은 잘 맞는지, 요즘 새로운 관심사는 무엇인지 등등등. 나는 그 친구보다 수능을 훨씬(x5) 잘 봤고 우리는 같은 전공자였기 때문에, 차오르는 자부심과 우월감을 소맥과 함께 삼키느라 힘들었다.
그 친구는 내가 고3 때 다녔던 입시 미술 학원의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라고 해봤자 고작 20세로, 이제 막 입시를 치르고 용돈이나 벌기 위해 파트 타임으로 나오는 이들 중 하나. 참으로 특별한 것이 없으나, 학원의 유일한 남자 대학생 선생님이라는 타이틀에 꽂혀버린 나는 그를 몇 개월 째 짝사랑하고 있었다.
방학 맞이 여름 특강이 시작되던 무렵, 누군가의 밀고를 통해 그 친구가 내 마음을 눈치챘다. 어느 부분에서 마음이 동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학원이 끝나고 집에 가는 밤마다 나에게 문자를 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나는 우리 사귈래? 문자까지 받아내고야 말았다.
그 친구와는 달리 나는 고3이었기 때문에 데이트는 건전하고 짤막하게 일요일에 한 번 진행되었다. 서로의 중간 동네 카페에서 커피를 먹거나, 아이스크림 하나를 들고 놀이터 그네에 앉아 수다를 떨거나. 평일엔 학원에서 조심스럽게 눈빛을 주고받거나, 물감으로 하트를 그린 쪽지를 서로의 앞치마 주머니에 툭 흘려놓고 가거나. 은밀하고 달콤하며, 찰나와 같은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연애는 한 달도 안 돼서 쫑이 났기 때문에.
우리는 동네 어귀에서 치킨을 먹고 있었다. 그 친구는 맥주 한 잔을 매우 땡겨 하였으나, 나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우리에게 허용된 음료는 콜라뿐이었다. 그는 나 혼자 마실 건데도 주문이 안 되느냐, 몇 번을 되물었고 사장님은 거 참 안된다니까 몇 번을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계산을 하고 나가는 순간까지도 아, 맥주 못 먹어서 아쉽네... 라고 중얼거렸던 그는 그날 밤 나에게 전화를 걸어 이별을 통보했다. 내가 착각했었나봐. 통화 시간은 3분도 안 되었다. 나는 전화가 끊기자마자 그날 그 친구와 함께 먹은 치킨을 다 토해냈고. 그 이후 한 달 간 치킨 냄새도 못 맡았다. (지금은 물론 없어서 못 먹는다)
그 치킨 집에서 그는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한 살 차이긴 하지만 선생님이란 신분으로 학생과 연애를 하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던 것인가? 아니다. 그렇게 심오한 사유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치맥 하나 함께 할 수 없는 나에게 흥미를 잃었던 것이다.
지나간 기억을 곱씹으며 맥주병이 세 병에서 네 병으로 늘어날 때쯤, 본격적으로 그 친구의 주접이 시작되었다.
"내가 그땐 너무 어려서 뭘 몰랐어."
(니가 얼마나 싸가지가 바가진지 몰랐다는 얘기지?)
"그 뒤로 너 닮은 여자만 사귀었는데 니 생각이 나서 오래 만나지도 못 했어."
(난 대학 와서 니 생각할 시간도 없이 너무 바쁘고 즐거웠단다!)
"이렇게 답장해줄지 몰랐는데, 만나줘서 고마워."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오늘 먹은 것 전부 니가 사도록 해)
"그리고 나, 니가 써준 편지 아직도 갖고 있어."
뭐 편지????
"니가 써준 편지, 기억하지? 나 그거 하도 많이 읽어서 이제 너덜너덜해졌어."
맙소사.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저녁 시간, 대형 서점에서 편지지를 고르고 있는 교복 차림의 내가 보인다. 기나긴 짝사랑의 결실을 맺은 흥분을 삭히지 못해, 그에게 편지를 쓸 작정이었던 것이다. 아무런 무늬가 없는 채도 낮은 개나리색 편지지와 하이테크 0.3mm 갈색 펜 하나를 구매한 나는 그날 새벽이 깊어가는지도 모르고 사각사각, 총 네 장의 편지를 썼다. 요즘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너를 얼마나 많이 좋아하고 있는지,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너를 그리워하고 있는지…가 아니라. 나는 어린 왕자와 여우의 이야기를 적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책이 있는 마을' 출판사의 ‘최복현’님이 번역한 버전으로.
ㅡ 내 생활은 단조로워. 나는 닭을 쫓고, 사람들은 나를 쫓지. 닭들은 모두 서로 비슷하고, 사람들도 모두 비슷해. 그래서 난 좀 권태로워. 그러나 네가 날 길들인다면 내 생활은 햇빛을 받은 것처럼 밝아질거야. 다른 발자국 소리와는 다르게 들릴 너의 발자국 소리를 나는 알게 될거야. 다른 발자국 소리가 나면 나는 땅 속으로 숨을 거야. 네 발자국 소리는 음악소리처럼 나를 굴밖으로 불러낼거야. 저길 봐! 밀 밭이 보이니? 나는 빵을 먹지 않아. 밀은 나한테 쓸모가 없어. 밀밭을 보아도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그래서 슬퍼! 그러나 네 머리칼은 금빛이야. 그래서 네가 날 길들인다면 정말 신날 거야! 밀도 금빛이기 때문에 밀은 너를 기억하게 해줄 거야. 그래서 밀밭을 스치는 바람소리까지 사랑하게 될거고… ㅡ
아아, 편지를 준 날 그의 표정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연인으로부터 기대하지 않았던 연애편지를 받았을 때의 작은 놀라움, 나를 위해 책상에 앉아 펜을 쥐고 있는 상대의 모습을 떠올리며 몰려오는 감동, 과연 이 안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을까 상상하며 편지 봉투를 만지작거리는 기대감. 가방에 넣어둔 그 얇고 가벼운 물건에 마음이 사로잡혀 집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어쩌면 버스에서 운 좋게 자리를 잡고 앉아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단숨에 읽어 내려갔을 수도 있고. 그리고 받을 때와 같은 방법으로 다시 고이 접어서 봉투 안에 넣어두었겠지.
“편지를 읽을 때마다, 그때 네가 날 얼마나 좋아해줬는지 깨달았어. 그런 널 그렇게 차버린 내가 너무 바보같더라."
마지막 내뱉은 말까지 아주 완벽하게 최악이었다. 그렇다. 연애편지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사랑의 마음에 실질적 형태를 선사하여, 연애가 끝나고 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당시의 온도를 미약하게나마 더듬어볼 수 있는 기적적이면서도 끔찍한 물건이었다. 비록 그 연애가 어린아이 소꿉장난에 비유할 짧은 시간이었다 해도. 정작 그것을 써 준 당사자는 당장 두 손으로 그것을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있다 하더라도. 편지의 힘이란 실로 위대했던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소설과 시를 통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새벽 내 손가락에 쥐가 나도록 힘주어 적은 나의 사랑스러운 어린왕자와 여우가, 지금은 이름조차 떠올릴 이유가 없는 남자의 책상 서랍 어딘가에 몇 년이나 보관되어 있었다니. 비통함과 동시에 어찌 보면 웃긴 일이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의 본분대로 읽히고 또 읽혔다는 사실이. 마치 골룸의 손에 들어가 스스로 세상에 나올 수 있을 때까지 힘을 키운 절대 반지처럼, 내 손에서 탄생했지만 나를 떠난 뒤 새로운 주인의 관심과 애정을 먹고 강력한 존재로 거듭나게 된 절대 편지로구나. 참으로 기가 막혔다.
2차로 간 파전집에서 그 친구는 막걸리 한 병에 정신을 놓았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미안해, 내가 미안해, 혼자 중얼중얼거리는 그의 추태에 동정심도 들지 않았다. 나는 화장실에 가는 척 테이블을 빠져나와 후다닥 계산을 하고 그곳에서 벗어났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내일 눈 뜨자마자 경건한 마음으로 어린왕자를 정독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아마 지긋지긋한 숙취 때문에 그리 하지는 못 했고. 그 날 이후 나는 한 번도 내가 좋아하는 소설이나 시의 구절을 인용하여 편지를 쓰지 않았다.
그 뒤로 강산이 변할 만큼의 세월이 더 흐른 지금, 씁쓸하게도 내 책상 서랍에는 낡은 연애편지의 존재는 없다. 받기야 많이 받았지만 굳이 연애가 끝난 뒤 문득 생각이 나 한 번 더 펼쳐서 읽어보고 싶은 것은 한 개도 없더라는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나는 누군가와의 추억을 곱씹고 싶을 때, 반대로 내가 그에게 썼던 편지를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 편지지의 색, 편지를 쓰던 시간, 그를 생각하며 한 줄 한 줄 적어 내려갔던 그 모든 문장들. 위의 친구처럼 모든 편지의 주인이 그것을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을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어쨌든 내가 쓴 것이니 가끔씩 떠올리며 음미할 자격이 있겠지.
언젠가는 나도 그런 편지를 받아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헤어진 뒤에도 읽고 또 읽어서 너덜너덜해질 절대 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