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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Jun 12. 2019

반려동물의 기일에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

이 이야기는 나의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다. 반려동물과 함께 하고 있거나, 반려동물을 먼저 떠나보낸 적이 있다면 공감할 수도 있는.

오늘은 처음으로 맞이하는 우리 애의 기일이었다. 날짜를 외우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6월이 시작되면서 사진첩 1년치를 위로 올려 오늘인 걸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건 따로 있다. 바로 내 기분이다. 작년의 오늘과는 다르게 예고 없이 맨바닥으로 내팽개쳐진 물고기처럼 고통스럽지는 않다. 그러니까, 제법 덤덤하고 초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나의 하루는 어땠냐면.

10시. 귀청 떨어지는 알람에도 매우 힘겹게 기상한다. 토요일이지만 평일과 주말의 경계가 없는 프리랜서는 오늘 촬영 알바가 있다. 늦잠 잔 와중에도 빈속에 카메라 잡을 자신이 없어 어제 먹다 남긴 참치찌개와 계란후라이에 급한 아침 식사를 한다.

12시 반. 촬영 장비를 대여하기 위해 압구정에 도착한다. 아뿔싸. 벌써 다른 피디님과 감독님이 장비를 모두 대여해놓았다. 뻘쭘하게 인사를 하고 카카오 택시를 부른다.

1시 반. 촬영 장소에 도착한다. 아는 사람은 없지만 관계자로 보이는 모두에게 인사를 한다. 장비를 꺼내서 세팅을 시작한다.

7시 반. 촬영이 끝났다. 저녁을 먹으러 향한다. 메뉴는 한우 샤브샤브다. 뜨거운 줄도 모르고 야무지게 퍼먹는다. 고기 떨어졌다. 한우를 2인분 추가한다. 식당에선 동남아에서 여행 온 대가족 20여명의 생일 파티가 요란하게 벌어지고 있다. 여기가 채선당인지 베트남인지 헷갈린다.

8시 반. 다시 압구정으로 이동하여 장비를 전부 반납한다. 장비 중 일부를 빠뜨린 건 없는지, 고장난 데는 없는지 렌탈샵 직원들이 꼼꼼하게 체크한다. 담배를 한 대 피고, 냉장고에서 망고 음료수를 하나 꺼내 먹고 있으면 확인 다 끝났다는 말이 떨어진다.


9시. 집에 가는 지하철 안, 이어폰을 꺼낸다. 오늘 촬영 때 공연을 했던 한 인디 밴드가 맘에 쏙 들었다. 멜론을 탈탈 털어 플레이리스트를 가득 채운다. 곧 카톡 비지엠으로 등극할 것이다.


10시.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다. 샤워볼에 바디워시를 손톱만큼 짜서 빡빡 문대 거품을 잔뜩 만든다. 한여름이지만 샤워는 역시 뜨거운 물로 해야 개운하다.


10시 반. 퇴사 뒤에도 여전히 내 화장대를 차지하고 있는 전 회사의 제품들로 스킨케어 3단계를 마친다. 빠르게 방불을 끄고 침대에 엎드려서 맥북을 켠다...


쯤이면 내 하루가 이미 끝난 것 같지만 아직 아니다. 오늘은 글 하나를 쓰고 잘 것이다. 바로 나의 고양이에 대해서.


나의 고양이는 내 스물한살 여름 나에게로 왔다.

나의 고양이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발견되었다. 나의 고양이는 러시안 블루처럼 생겼지만, 배 아래쪽에 하트 모양의 흰색 털이 있었다. 나의 고양이는 창밖을 구경하다가 행인이 자신을 발견하고 말을 걸면 현관으로 뛰어가 당장 문을 열라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나의 고양이는 동물병원에서 개, 고양이 할 것 없이 마주치는 애들한테 시비를 털고 다녀서 케이지 밖으로 나오기가 금지되어 있었다. 나의 고양이는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귓가에서 이름을 부르면 꼬리를 흔들어 대답했다. 나의 고양이는 삶은 계란, 후라이드 치킨, 새우버거 냄새에 환장했다. 나의 고양이는 8년 동안 잔병치레로 나를 속 썩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나의 고양이는 내 스물여덟살 여름 나와 작별했다.


그 해 여름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현관문을 열 때마다 나도 모르게 내 시선이 그 애가 마중 나오던 위치로 향하는 것을 느꼈다. 밤마다 그 애가 불 꺼진 방을 돌아다닐 때 나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고, 침대에 엎드려 있을 때마다 창가에 앉아있던 그 애가 침대 위로 툭 착지할 때의 무게감이 나를 덮쳤다. 계란을 삶을 때마다 야옹거리며 내 종아리에 몸을 비벼대던 그 촉감이 떠올라 다리를 긁어댔고, 참치캔을 깔 때마다 어디서든 튀어나오던 그 애를 찾아 내 방을 한참 동안 두리번거렸다.


술은 시한폭탄이었다. 원래도 눈물이 많은 나는 한 사람의 눈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물을 뽑아낼 수 있는가 생체 실험 중인 것처럼 울어댔다. 버스 안이든, 길거리든 때는 가리되 장소는 가리지 않았다. 정신이 알콜에 잠식당한 뒤면 아침마다 팅팅 부어터져 무거운 눈꺼풀을 올리느라 힘겨웠다. 하지만 위에 적은 오늘 나의 하루를 통해 유추할 수 있듯이, 끝내 모두 다 멎었다.


몇 개월을 쓸고 쓸어도 어디선가 끊임없이 굴러오던 그 애의 털이 더이상 보이지 않을 때쯤이었나. 슬픔은 결국 희미해지고, 추억(및 핸드폰 속 시청각 자료들)만이 남더라.


나의 고양이와 8년을 함께 한 이 곳에서 나는 지금 아주 잘 지낸다. 지금은 물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아아, 나도 예전에 고양이 키웠었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지경이다. 물론 슬픔이 옅어진다고 그리움이 옅어지는 건 아니다. 그 애가 내 머리맡에서 잠들 때 쪼물딱거리던 뱃살의 촉감이 그립고, 번쩍 들어 올리면 골골거리며 품에 폭 안기던 그 온도가 그립다. 그저 이 모든 것들을 떠올릴 때 더이상 눈물 콧물은 안 뺀다는 이야기지.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누가 처음 만든 것인지. 감사의 의미로 약값을 꼭 지불하고 싶다.


반려동물의 기일에는 무엇을 해야 하나. 아침밥을 든든히 챙겨 먹고 평소처럼 할 일을 시작할 것. 모든 일과가 끝난 뒤에는 개운하게 샤워를 할 것. 그리고 하루의 마지막엔 편지 한 통을 쓸 것. 와줘서 고마웠다고. 여전히 매 순간순간 사랑하고 있다고. 곧 다시 만나서 또 재미있게 놀자고.


내년은 오늘보다 조금 더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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