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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조 Jun 16. 2022

외할머니와 피자 그리고 오징어튀김

추억은 맛을 타고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떠올리면 언제나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돌아가신 외할머니시다. 외할머니는 부산의 어느 부잣집 막내아들에게 시집을 왔는데, 외할아버지 댁은 당시 동네에서 꽤 알아주는 집안이었고, 형들이 모두 한국전쟁에 나가서 막내인 외할아버지는 그때 그 시절에 전쟁에도 참전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젊을 때 몇 년을 제외하고는 직장 생활을 하시지 않았고, 아무리 원래 부잣집이었어도 자식 5명을 먹여 살려야 하니 외할머니는 홀로 장갑공장을 운영하며 돈을 벌고 살림을 사셨다고 했다. 다들 배고프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면 집에서 일하는 식모 언니들도 항상 있었고, 집에 텔레비전도 있었고, 동네에 몇 없는 전화기도 있었다고 했다. 엄마의 색이 바랜 흑백 사진에는 분명 부의 향기가 느껴진다. 외할아버지는 젊어서부터 워낙에 멋을 잘 부리고 다니셨기 때문에 항상 외출할 때 중절모와 시계, 반지를 멋있게 장착하고 나가셨고, 연세가 꽤 드신 후에도 반짝거리는 백구두를 신고 다니실 정도로 강렬한 패피(패션피플)의 이미지가 기억 속에 있다. 그래서 그런지 키도 크고 인물도 훤칠하신 외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여자 깨나 울렸겠다 싶은 비주얼이다. 어릴 때는 잘 몰랐지만 나이가 들수록 외할아버지의 불같은 성격과 밖으로 다니기 좋아하시는 성향 때문에 외할머니가 속 썩으셨을 생각에 외할머니가 더 짠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외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기억나는 한 장면이 있다. 영국으로 이민 가셔서 30년 넘게 사셨던 막내 이모는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이 가장 짧아서 일까.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리시며 할머니가 생전 좋아하셨던 박카스를 영정사진 앞에 놓았다. 이모는 박카스를 보면 할머니가 생각난다고 하셨다. 나는 그때 영정 사진 앞의 박카스가 슬퍼 보여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외할머니를 존경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할머니가 그때는 드물었던 신여성이셨기 때문이다. 여자는 대학보다는 시집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197-80년대에 엄마를 비롯한 모든 여자 형제들을 대학을 보내고 뒷바라지를 하셨다. 부산에 살던 엄마가 서울까지 대학에 가는 걸 머뭇거릴 때 크게 되려면 큰 도시로 가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서울 유학을 보내셨고, 엄마의 젊은 시절에 등장하는 외할머니도 언제나 진취적이고 앞서가는 분이셨다. 미국에서 한창 공부할 때도 외할아버지는 코쟁이와 껌둥이는 사귀면 안 된다고 매번 강조하실 때 외할머니는 사람만 괜찮으면 그게 뭐 문제냐며 할아버지를 나무라시기도 했었다. 외할머니는 한결같이 우리 손자, 손녀들을 자랑스러워하시고 많이 아껴주셨는데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나는 피자가 떠오른다. 


   한국에서는 피자가 대중화된 것이 1980년대 말 피자헛의 등장이었는데, 1990년대의 어린 시절을 보낸 나의 기억 속에도 외식 단골 메뉴로 피자가 있었다. 소위 고급 음식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특별한 날에 피자를 먹었던 즐거운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콤비네이션 피자가 우리 집의 고정 메뉴라 외식이나 배달 모두 언제나 콤비네이션 피자를 먹었다. 내가 중학교 때쯤이었을까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와 계셔 며칠간 지내셨는데 피자가 먹고 싶다는 내 말에 엄마는 외할머니가 와계셔서 한식을 먹어야 해 안된다고 하셨다. 그런데 외할머니께서는 피자를 좋아한다고 시켜보라고 하시더니 소녀 같은 얼굴로 피자를 맛있게 드셨는데 그 모습이 지금도 또렷하다. 그때를 생각해 보면 어린 마음에 할머니가 역시 신여성이셔서 피자를 좋아하시는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도 그 장면이 기억이 나는 걸 보면 할머니와 피자는 역시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나 싶다. 물론 이제 할머니가 된 우리 엄마도 피자를 좋아하시기는 하지만.


  피자, 하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은 페퍼로니가 잔뜩 올라간 소금기 가득한 미국식 피자다. 미국 고등학교 시절 카페테리아에서 가장 자주 먹던 흔한 메뉴가 네모난 모양으로 잘린 페퍼로니 피자였다. 얇은 일회용 종이접시에 피자의 기름기를 꾹꾹 눌러서 그렇게 맛있지도 않고 짠맛이 잔뜩 나는 식은 피자를 먹었던 짧았던 미국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다. 대학 시절 학교 안에 <라운드 테이블 피자>라는 오래된 미국 체인 피자집이 있었는데 그때 그곳에서 먹었던 페퍼로니 피자와 자유로운 펍 분위기의 식당은 잊을 수 없다. 미국에 치맥은 없지만 피자와 맥주를 함께 먹는 피+맥 조합은 워낙 익숙해 피자집에 가면 맛있는 맥주도 항상 함께 있었다. 보통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미국 사람들도 피자 위에는 크러시드 페퍼(*잘게 부순 말린 고추)를 잔뜩 올려 느끼한 피자를 매콤한 맛으로 먹는 광경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어릴 때 먹던 추억의 콤비네이션 피자도 맛있고 미국 생각나는 페퍼로니 피자도 좋고 치즈가 듬뿍 늘어지는 시카고 딥 디쉬도 훌륭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포테이토 피자를 가장 좋아한다. 포테이토 피자는 한국에만 있는 특별한 한국식 피자라 나는 포테이토 피자는 감히 한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웨지 감자를 올린 포테이토 피자는 달콤한 맛과 짠맛이 잘 어우러진 맛이다. 한국식 피자에는 새우, 고구마 무스, 스테이크 등등 온갖 종류의 식재료를 피자 위에 올려 어떤 재료까지 피자로 만들어 먹을 수 있나 실험을 보는 것 같은 보는 재미도 있다. 


  요리에 큰 흥미가 없으신 우리 엄마는 아빠 일을 도와 늘 바쁘시기도 했고 어릴 때부터 간단하게 조리할 수 있는 간식을 주로 해주셨는데,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오징어튀김, 탕수육, 맛탕처럼 손이 많이 가는 간식을 종류별로 해주셨다. 학교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을 때 신문지가 잔뜩 바닥에 깔려있고 지글지글 향긋한 기름 냄새가 나면 집에 외할머니가 오신 것이었다. 할머니가 깔아놓은 신문지 위에서 신나서 뛰어놀다 보면 발바닥이 신문지 잉크 때문에 시커멓게 변하기도 했다. 외할머니는 살아계실 때 종종 나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리시며 말씀해 주셨다. 아빠의 일로 영국에서 잠시 살아야 했던 우리 가족은 영국 런던으로 갔는데, 엄마는 4살 난 언니를 데리고 만삭의 무거운 몸으로 영국으로 가야 하셨기에 나의 첫 비행은 엄마의 뱃속에서였다. 이후 1년 6개월 터울의 남동생이 태어났을 때 엄마의 산후조리를 위해 외할머니께서 영국으로 오셨는데, 엄마의 바짓단을 붙잡고 할머니 얼굴을 올려다보는 내 얼굴이 엄마 어릴 때랑 너무 똑같이 생겨서 신기했다고 몇십 년이 지나도록 행복한 얼굴로 이야기해 주시곤 하셨다. 


  외할머니는 언제나 우리 가족의 기둥이셨고, 집안의 지혜로운 어른이자 인생의 선배셨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세상의 모든 할머니를 볼 때마다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외국에 사느라 할머니를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서울과 부산이라는 물리적 거리를 핑계로 할머니 얼굴을 자주 못 뵈었던 것이 아쉽다. 요즘도 가끔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 속 외할머니 모습을 볼 때마다 할머니가 지금 살아계시다면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고 손도 많이 잡아드릴 텐데 하는 생각에 눈물이 차오른다. 어릴 때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오징어튀김, 쥐포튀김이 최근에 종종 엄마가 준비해 주시는 밥상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할머니가 튀김을 맛있게 잘 튀기셨는데 엄마는 손맛이 없어 그 맛이 잘 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데 괜히 슬픈 마음이 들었다. 몇 해 전에 외할아버지까지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가 ‘엄마 이제 고아됐다’라는 말에 ‘고아라고 하기엔 엄마 나이가 좀 많지 않으냐’고 장난스럽게 대답했던 엄마와의 짧은 대화가 떠올랐다. 나는 엄마의 인생 절반만큼 밖에 살아보지 못했고, 지금은 엄마가 없는 세상이란 어떤 것일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지만, 엄마의 그 말에 나이가 몇 살이던 지 부모님의 무게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은 마음을 담아 엄마가 열심히 튀겼을 오징어튀김을 보니 거실 바닥에 깔려있던 신문지와 나의 기억 속 외할머니의 가장 밝은 얼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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