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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fool─한자연에게

love me love me say that you love me……

by 소윤

lovefool

─한자연에게


15년 지기 친구이자 고등학교 동창인 한자연과 동네 바에 앉아 있었다. 나는 달달한 칵테일, 한자연은 독한 위스키.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며 홀짝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한자연이 사장님을 부른다.


사장님. 혹시 신청곡 틀어주실 수 있어요?


또 시작이구나. 뜬금없고 엉뚱한 부탁. 이런 건 너무 한자연답다. 그런데 신청곡을 부탁하는 한자연의 목소리가 제법 간절해보여서 더 말을 얹지 않기로 한다. 한두 곡 정도는 틀어드릴 수 있어요. 다행히 사장님의 상냥한 대답이 돌아온다. 감사합니다! 한자연이 냉큼 휴대폰을 내민다. 사장님, 그럼 이 노래 틀어주세요! 휴대폰을 확인한 사장님은 주방으로 돌아간다. 바 안을 가득 채우던 배경음악이 페이드아웃 되고 곧이어 흘러나온 노래는……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면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등교 거부 학생이었다. 학교에 가도 친구가 없었다. 친구 대신 환청과 사귀었다. 이어폰을 아무리 깊이 꽂아도 모두가 나를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쟤 또 왔어. 미친년. 뭐 하러 학교에 처 나오냐? 쟤 좀 또라이 같지 않냐? 나중엔 그게 내 병증─심한 조울증으로 인한 조현 증상─의 일부였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는 그 환청이 너무 듣기 힘들어서 학교에 안 갔다.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척하며 동네 구립도서관이나 광화문 교보문고를 떠돌았다.


출결은 한참 모자랐고 내신은 엉망이 되었다. 출석 일수를 이틀 남겨두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한자연은 내가 고등학교에서 처음 사귄 친구였다. 한자연이 교문 앞에서 나눠주는 미술 학원의 갱지 노트를 가지고 와서 내게 내민 것이 시작이었다.


너 뭐 글 쓴다며? 그럼 주지훈이랑 나랑 주인공으로 팬픽 써주라.


나는 그 조악한 갱지 노트에 주지훈과 한자연의 러브스토리를 정말 열심히 썼다. 한자연이 쓰라는 대로 썼다. 순정한 사랑 이야기를 쓰라고 하면 순정하게 썼고, 야하게 쓰라고 하면 열아홉이 떠올릴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정말 야하게 썼다. 내 모든 창작혼은 그때 다 불태웠다. 불태워도 좋았다. 창작혼보다 더한 것도 바칠 수 있었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환청이 들리지 않았으니까. 내 유일한 독자가 한자연이었기 때문에. 수능특강은 책상 서랍 속에 처박아두고 하루 종일 노트에만 매달렸다. 한자연에게 노트를 보여줄 때마다 엄정한 심판을 받는 심정이 되었다. 한자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하는 듯하다가 킥킥거리며 웃기도 하고 가끔 눈물을 그렁거리기도 했다.


마침내 한자연이 노트를 돌려주며 말했다.


야 미친, 너 존나 야하게 잘 써.





한자연이 어느 날 내게 부탁을 해왔다. 아침에 일어나는 거 너무 힘들어. 모닝콜 좀 해주라. 아침 7시에 겨우겨우 일어나던 나는 다음 날부터 정확히 새벽 6시 50분에 눈을 떴다. 머리맡에 늘 휴대폰을 두고 잤다. 핑크색 롤리팝 휴대폰. 또각또각. 한자연의 전화번호를 누르면 어김없이 수화기 너머에서 한자연이 컬러링으로 설정해둔 The cardigans의 lovefool이 흘러나왔다.


Love me Love me Say that you love me

Fool me Fool me Go on and fool me

Love me Love me Pretend that you love me

Leave me Leave me Just say that you need me


한자연은 언제나 잔뜩 갈라지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야, 일어나, 학교 가야지. 그러면 한자연은 늘어지게 하품하면서 대답했다. 아 존나 졸려. 깨워줘서 고맙다. 통화는 늘 간결하게 끊겼다. 그때 처음으로 무언가가 ‘끊어진다’는 감정이 두렵지 않았다. 교실로 들어가면 한자연이 있고, 한자연과 나는 노래처럼 이어져 있었으니까.


수능 전까지 한자연에게 모닝콜을 해줬다. 고맙다는 말로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이 좋았다. 나는 수업 시간과 야간자율학습 시간 내내 한자연과 주지훈의 팬픽을 썼고, 그 팬픽이 워낙 명작으로 소문이 나서 반 애들끼리 돌려 읽기도 했다. 나중에는 팬픽 의뢰가 너무 많이 밀려들어 와 다른 애들을 주인공으로 팬픽을 써야 했다. 노트 몇 권을 다 채우도록 하루 종일 글만 썼다. 수능 전날까지 그랬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한자연은 공부하고 있었는데.


한자연과 나는 같은 시험장으로 수능을 치러 갔다. 언어는 깔짝깔짝 풀었고 수리는 3번으로, 외국어는 2번으로 밀었다. 시험이 끝나고 한자연과(고등학생 기준으로) 나름 비싼 양식집에서 돼지 통삼겹 스테이크를 썰었다. 상의는 교복 블라우스, 하의는 체육복 바지 차림으로 부평을 누비고 다녔다. 그날 이후 우리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 바뀔지, 어떤 어른이 될지, 아직 어린 우리는 도무지 알 수 없었기에, 밤이 늦도록 우리는 부평의 똑같은 거리를 돌고 돌고, 또 돌았다.


수능이 끝나고 한자연은 미대 입시에 매진하기 위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가끔 나오더라도 오전 수업만 듣고 갔다. 이제는 더 이상 한자연에게 모닝콜을 해주지 않아도 됐다. 그래도, 그래도, 그렇지만. 전화를 걸려다 만 적도 있다. MP3에 The cardigans의 lovefool을 넣고 틈날 때마다 들었다.






기억나냐? 그 노래. 럽미럽미세이댓츄럽미. 한자연이 남은 위스키를 입에 탈탈 털어 넣으며 묻는다. 당연히 기억하지, 내가 그 노래를 어떻게 잊냐. 평생 가도 못 잊을걸. 내가 대답하며 남은 칵테일을 들이켠다. 그러자 한자연이 툭, 말한다. 심상하고 여상하게, 아주 별거 아니라는 듯이, 정말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런데 너가 모닝콜 해줄 때마다 나 깨어 있었던 거 아냐?


서른넷의 우리는 단박에 열아홉으로 되돌아간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을 더듬어 휴대폰을 집어 들고, 한자연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걸면 어김없이 흘러나오던 love me love me say that you love me…… 갈라지는 목소리로 하품하며 전화를 받던 한자연.


그때 어디서 봤는데 우울증 걸린 사람한테는 무슨 역할을 주면 좋다나?


모닝콜을 해줄 때마다 열일곱의 한자연은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야 존나 졸립다. 그지 않냐? 깨워줘서 고맙다. 이따 보자.


그리고 서른넷의 한자연은 담담하게 말한다.


담임이 나한테 부탁했그든. 너 학교 좀 잘 나오게 해달라고.


열아홉의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끊어진다’는 게 두렵지 않았다. 교실로 들어서면 한자연이 있었고, 우리는 끝나지 않는 노래처럼 이어져 있었으니까. 사랑 자, 이을 연, 자연이라는 이름처럼.


그땐 조울증이니 뭐니 그런 거 잘 몰랐는데, 그냥 친구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줘야 된다고 생각했어.


이윽고 바 안에서 한자연의 신청곡이 흘러나온다.


Dear, I fear we're facing a problem

You love me no longer, I know

And maybe there is nothing that I can do to make you do……


한자연은 장난스레 웃는다. 야 뭐야, 너 진짜. 나는 너무 놀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열아홉의 나를 살렸던 노래를, 서른넷의 내가 살아서 듣는다. 노래는 어느덧 후렴으로 향하고, 노래가 내 안에서, 한자연 안에서 울린다. 열아홉의 신윤희와 열아홉의 한자연이, 서른넷의 신소윤, 서른넷의 한자연과 공명한다. lovefool. 사랑의 바보라는 뜻인데 열아홉의 우리는 아마도 사랑을 너무 잘 알고 있던, 사랑의 천재였던 것 같다. 사랑 자, 이을 연. 자연이라는 이름처럼 지금까지도 이렇게 이어져 있으니까.


드디어 내가 수십, 아니 수백 번은 더 들었던, 내가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게 해주었던, 더 이상 환청이 안 들리게 해주었던, 언젠가 나를, 지금까지도, 아주 많이많이 살렸던.


그 구절이 나온다.


Love me Love me Say that you love me

Leave me Leave me Just say that you need me

I can't care 'bout anything but you……


날 사랑해줘요. 그래요,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바보처럼 속여도 괜찮아요. 날 곁에 두고, 내가 필요하다고 말해줘요.

난 당신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쓸 수 없어요.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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