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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윤 Dec 03. 2021

돌봄, 돌아오는 봄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은 의연하다. 내가 방 안에서 목을 맸을 때도 동생은 울지 않았다. 다만 이를 악물고 스타킹이나 노끈, 밧줄의 매듭을 풀어냈을 뿐이다. 가족들이 잠들었을 때 그 짓을 했기 때문에, 이제 동생은 내가 잠들기 전에는 잠들지 못한다. 얼마 전 동생과 함께 병원에 갔다. 의사 선생님께 진료를 받는데 동생이 핸드폰 메모장을 켰다. 거기엔 한 달간의 내 상태와 약 부작용 등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동생에게 10만 원이 넘는 원목 오거나이저를 선물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내 직속 사수 K팀장은 내가 거의 한 달 넘게 업무 공백을 빚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소윤의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며 나를 독려한다. 덕분에 그는 업무 과부하에 걸렸다. 그는 오늘도 야근을 한다. 11월에 나왔어야 할 내 책이 내년 1월에 나온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고 느낄 때마다 팀장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문제 없다고, 아무 문제 없게 내가 만들 거라고, 소윤은 잘 하고 있고 하던 대로 하면 된다고, 그리고 언제든 힘들면 쉬고 돌아오라고 말한다. 돌아오라고, 돌아오면 된다고.

친구 P와는 영화 <듄>을 보러 가자고 약속했었다. P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팬이다.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 날, 나는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P와의 약속을 자주 어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는 내게 약속하고, 또 약속한다. 곱창을 먹으러 가요. 충무로의 예쁜 카페에 가요. 내가 지키지 못할 약속일지언정 P는 끊임없이 내게 약속해준다. <듄>이 영화관에서 내려가기 전에 나는 P와 <듄>을 꼭 보고싶다. <듄> 말고 앞으로 개봉할 영화도 계속 계속 보고 싶다.

훌륭한 편집자이자 내 입사 동기인 J는 내 병의 사려 깊은 이해자다. 그는 얼마 전 저명한 작가와 여성 우울증에 관한 책을 함께 만들었다. 나는 J가 그 책을 만듦으로써 나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J는 그 책을 만들기 전부터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이해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책을 한 장 한 장, 아주 귀하게 아껴 읽었다. 나는 회사에 자주 결근한다. 때로는 한 달 가까이 병가를 쓸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는 점심시간마다 나와 커피를 마신다. J는 종종 내게 병에 대한 새로운 인사이트를 주는 좋은 글들을 공유해준다. J는 언젠가 소윤의 가장 큰 재능은 ‘사랑’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동안 그 말이 나를 살게 했다.

학교 후배인 L과는 사실 데면데면한 사이다. 단 둘이 밥도 먹어본 적 없다. L은 언젠가 내게 글을 한 편 써달라고 부탁했고, 그 글의 참고자료가 될 만한 책을 내게 빌려주었다. 역시, 나는 그 글을 써내지 못했다. 아주 오랫동안 그 책을 품고 있었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L은 책을 돌려받으면서 내게 고양이 피규어와 작은 카드를 주고 갔다. ‘조금 이르지만, 크리스마스 선물이예요.’ 카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앞으로도 언니 글을 계속 읽고 싶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은 나를 용서해주었다.

그는 나를 괴물이 되지 않게 했다.

그것으로 됐다.

나는 예전에, ‘돌봄’이란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받는 것, 그럼으로써 누군가를 필연적으로 착취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여러 이들에게 돌봄을 조금씩 나누어 받고 있고 그것은 더 큰 돌봄이 되어 돌아온다.

내가 목을 매도,

회사에 가지 못해도,

책을 만들지 못해도,

약속을 어겨도,

글을 쓰지 못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돌아오는 봄에는.

더 나아갈 수 있기를, 병이 나아가고 그로 인해 내가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기를. 언젠가는 일 얘기를 다시 쓰고 싶다. 내가 너무도 사랑해 마지않는 책 만드는 일에 관하여, 누군가의 생각을 감각으로, 하나의 물성으로 내놓는 일에 관하여. 그때까지 이들이, 돌아오는 봄까지 내 여정과 함께 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후에는 나도 누군가를 돌볼 수 있기를.

벽에 비치는 한 줄기 해 그림자에게 세상 전부를 다 주어도 아깝지 않았다는 마야코프스키의 시를 좋아한다. 그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봄을 나눠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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