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양극성장애 2형 진단을 받은 정신질환자입니다. 저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환우들이, 이 세계에서 끝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고통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평행세계의 나를 상상한다. 평행세계의 나는 아프지 않다. 건강한 나. 아침에 아무 생각 없이 쉽게 눈을 뜬다. 별다른 생각 없이 씻고 나간다. 지하철도 잘 탄다. 숨이 막히거나 불안하지 않다. 흉통을 느끼지도 않는다. 사람이 많은 곳도 잘 간다. 매일 평범하게 똑같은 일상에 약간의 지루함을 느끼지만 주어진 일을 그럭저럭 해낸다, 점심시간에는 동료들과 수다를 떨거나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신다. 요령껏 에너지를, 75% 정도 소모하면서, 완전히 나가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이고, 나는 아주 미약하게나마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다.
평행세계의 나는 아프지 않다. 건강하다. 규격에 맞는 인간, 정상인이다. 다른 우주의 나는.
다시, 이 세계의 나를 직시한다. 이 세계의 나는 아프다. 건강하지 않은 사람, 병자. 정신병자. 양극성장애 2형, 나를 규정하는 진단명들, 나를 증명하는 알약들. 동이 틀 때쯤 이불 속에서 불안에 시달리며 눈을 뜬다. 숨이 가쁘다. 아침 7시가 오는 것이 두렵다. 집 안의 모든 시계를 부수고 싶다. 눈을 뜨자마자 약을 삼키고 오늘 하루를 직감한다. 아니, 예감은 불가능한 말이다. 내 어제는 오늘과 이어지지 않는다. 매일 매일 처음 사는 게 맞는데, 정말로 처음 사는 것 같아서 삶이 너무 낯설다. 매일 땅이 무너지는 느낌이다.
간신히 집 밖을 나와 지하철을 탈 때면 숨이 막힌다. 결국, 택시를 잡는다. 3만 8천 원을 내고 회사에 도착한다. 출근도 그나마 상태가 괜찮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어제의 내가 출근했다고, 오늘도 출근할 만큼 괜찮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내게는 한달 뒤가 없고, 일주일 뒤가 없고, 내일이 없다. 나는 당장 내일의 나를 계획하지 못한다. 내일은 출근할 수 있을까? 모레는? 그 다음 날은? 일주일 뒤는? 한달 뒤는?
살아 있기는 할까?
목매거나 뛰어내리거나, 한꺼번에 약을 삼켜버리지 않을 자신 있어?
사무실에 앉아 일하는 도중 공황발작이 온다. 황급히 파우치에서 비상약을 꺼내 삼킨다. 알프라졸람, 인데놀, 그러나 숨은 점점 가빠지고 손발은 차가워진다. 사무실 동료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선 안된다. 화장실로 도망친다. 급하게 문을 닫으면서도 화장실 칸에 가방걸이가 있는지, 줄이나 끈을 맬 수 있는 곳이 있는지를 확인한다. 나는 일부러 가방걸이가 없는 칸으로만 들어간다. 변기 뚜껑을 닫고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블라우스 안쪽으로 식은땀이 흐른다. 씨발, 씨발, 씨발, 머리를 쥐어뜯으며 간신히 비명을 억누른다. 이 순간이 지나갈 때까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숨을 몰아쉬며 기다린다. 기다린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숨이 멎기 직전까지 가서야, 겨우 지나간다.
눈물이 막 난다. 막 나는데, 사는 게 벌 받는 것 같아.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려주기만이라도 하면 좋겠어.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또 멀쩡해져서 다시 웃고 떠들고, 일을 하고. 진짜 이상하다. 방금 전까지는 딱 죽을 것 같았는데.
죽으면 다 끝나면 좋겠는데 그다음에도 자꾸 뭐가 있다고 그런다.*
첫 발병은 13년 전이다. 너무 오래 앓았다. 나는 아프지 않은 나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 아프지 않은 나는 평행세계의 나다. 아프지 않은 나를 상상하기 위해선 이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우주적 차원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어쨌든 이 세계에 발 딛고 있는 한 나는 아픈 사람이니까.
나는 이제 투병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투병은 병과 싸운다는 뜻이다. 병과 싸우면 내가 무조건 진다. 병을 어르고 달래고, 타협하고, 애원해야 간신히 일상을 이어갈 수 있다.
점심시간에 동료와 산책했다.
내가 화장실에서 패닉 어택이 왔을 때 동료는 옆 칸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애써 비명을 억눌렀지만, 입 밖으로 계속 새어 나와서 나는 짐승 같은 소리를 냈다. 동료는 많이 놀랐을 것이다. 동료가 애써 괜찮냐며 말을 건넸는데, 나는 헉헉거리며 제대로 대답하지도 못했다.
연못가를 걸었다. 걷다가 앉아 물을 봤다. 퍼렇게 고여 썩은 물, 그 물밑에도 물고기가 산다. 물고기들은 좋겠다. 아니, 이제 물살이라고 부른대요. 애초부터 고기로 태어난 게 어디 있어요. 실없는 소리를 하다가, 동료한테 말했다.
평행세계의 나를 상상해요.
그 세계의 나는 아프지 않은 거예요.
아프지 않은 나를 상상하려면, 새로운 세계가 필요할 만큼
이 세계에서 내가 건강하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예요.
그런데 아프지 않고 싶어요. 정말 아프지 않고 싶어요.
동료가 말했다.
계속 건강한 사람은 없어요.
누구나 건강했다가, 병들었다가, 조금 나아지면 다시 일하고,
그러다 또 병들었다가, 조금 나아지면 다시 살고, 그런 거니까.
나을 거라는 희망이 나를 좀먹는 것 같아요. 결국엔 낫지도 못할 거면서.
그러면 그런 희망을 갖지 않아도 돼요. 소윤 씨는 아파도 돼.
아파도 돼요?
아파도 돼요.
다정하고 선한 사람들, 그들은 내게 나으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 네가 아플 자리를 만들어 줄테니, 그 자리에서 마음껏 앓아도 좋다고 한다. 죄책감 없이 아파도 좋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출근에 실패할 때마다 죽고 싶다. 침대 밖에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을 때마다 절망한다. 낙오자가 된 것 같다. 그렇지만, 저만치 앞에서 묵묵히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목을 맬 때마다 여동생은 말없이 스타킹의 단단한 매듭을 풀어주었고, 내가 죽은 것처럼 누워 있을 때마다 엄마는 약과 차가운 물을 가져다줬다. 내가 책을 읽지 못하겠다고 엉엉 울자, 동생은 밤마다 소리내어 책을 한 줄 한 줄 읽어주었다. 동화책부터 시작해보자고 했다, 글을 읽지 못해서 교정을 볼 수 없다고 하자, 팀장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도와주겠다고 했다.
휴가를 낼 때마다, 부장님은 그저 괜찮다고 한다. 소윤 씨 몸이 맘처럼 안 돼서 너무 힘들겠다. 그런 말에 나는 또 운다.
8월에는 9일을 쉬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호의나 선의 없이는 살아가지 못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봐 주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가끔 두려울 때가 있다.
더는 내 병이 용납되지 않는 순간이 오면 어떡하지.
내일은 병원을 바꾸기로 했다.
노동하는 신체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는 가급적 아프면 안 된다. 오래 앓으면 도태된 인간이 된다. 내 건강함은 내 가치와 직결된다. 아프면 일할 수 없으니까. 나는 내가 아직도 권고사직 당하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회사에 다닌다. 한 달에 9번을 출근하지 못했는데. 한 달에 9번.
일하는 동안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노동하는 동안 나는 정상성에게 내 몸을 빌려준다. 노동하는 내 몸은 ‘건강 이데올로기’의 것이다.
그렇지만 평행세계의 내가 아는 이상, 나는 이 세계에서 필연적으로 아픈 사람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아픔이 찾아올 때 나는 온전히 내가 된다. 공황발작이 와서 숨이 멎기 직전에, 나는 내 몸이 완전히 나의 것임을 깨닫는다. 누구에게도 나눠주거나 공유할 수 없는, 온전한 나만의 고통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아무리 글을 쓰고, 말을 하고, 악을 써도, 이 고통은 번역되지 못할 것이다. 물론 나와 같은 진단을 받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 천 명 있다면, 천 개의 고통이 있다. 나는 내 고통의 유일한 경험자이자, 증언자이자 옹호자이다. 아픔은 이제 일종의 내 세계관이 되었다. 아픔은 내게 가장 고유한 것이 되었다. 세상에 똑같은 흉터가 없듯이.
아프다는 말이 약하다는 말과 동의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파도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마음껏 아프고 싶다. 죄책감 없이 아프고 싶다. 맘껏 아프면서 내 고통을 힘껏 증언하고 변호하고 싶다. 무조건 아프지 말라고 강요하는 이 세계로부터, 건강함과 정상성을 강요하는 이 세계로부터, 마음껏 아플 수 있는 나만의 자리를 지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