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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윤 Oct 05. 2022

소설을 쓰고 싶다

소설 만세

안녕. 아직은 쓰이지 않은 내 소설의 첫 문장아.

너에게 편지를 쓴다.


마지막으로 소설을 쓴 때가 스물여섯이었으니, 내가 소설을 쓰지 않은 지도 벌써 5년이 넘어가는구나. 지난 5년간 나는 아예 소설 쓰기를 작파하고 돌아앉았다. 소설 쓰기는 내가 너무 사랑하는 일이었다. 이만큼 사랑해본 일이 없었다. 무엇과 견주어도 바꿀 수 없는 그런 가치였다. 그렇기에 더 냉정하게 소설을 끊어냈다.


글 더 쓰실 생각 없으세요? 그런 질문에 나는 늘 위악을 부리며 ‘돈이나 벌어야죠.’라고 대답했다. 나는 소설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오히려 그런 위악이 내게 생채기를 남긴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더 독하게. 더 매정하게. 저 이제 글 안 써요. 돈 벌 거예요. 돈 아주 많이 벌 거예요.


그런데 요새는 종종 소설을 쓰던 때의 희열을 추체험한다. 정말 풀리지 않는 장면을 통과하고 난 뒤의 짜릿함. 카페에서 나도 모르게 소리 죽여 비명을 지르던 때를 회상한다.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나를 살게 하던 시절. 그때를 자주 떠올려. 같은 문장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청춘, 글이 써지지 않아 엉엉 울었던 엉망인 모습 같은 거.


지난주, 모 작가님으로부터 소설을 도저히 못 쓰겠다는 메일을 받았을 때 나는 그 메일을 쉬이 넘길 수 없었다. 바로 미팅을 잡고 카페에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감히 작가님께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저도 예전에 소설을 쓴 적이 있거든요… 이 말을 하는데 갑자기 심장이 덜컹거렸다. 아. 심장이 여기 있구나, 존재감을 과시하듯. 그래서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조금은 알아요. 글이 써지지 않으면… 아니 사실은, 너무나도 온몸으로 알아요. 글이 잘 써지지 않으면. 더는 내가 내 글을 쓸 수 없겠다고 자각하는 순간이 오면.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금 글밥을 먹으면서 살고 있다. 편집자로서,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온종일 누군가의 글을 다듬고 조탁한다. 매일 글을 읽고 쓰고, 다듬으면서 살고 있는데 아직 쓰이지 않은 내 문장아. 온전한 나만의 문장아. 이 일을 할수록 너와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네가 자꾸 도망치는 것 같아.


아니, 너는 도망친 적 없지. 백지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어. 도망친 쪽은 언제나 나였다. 빈 문서 위의 커서가 심장박동처럼 뛰고 있어서, 분명 커서는 일정한 속도로 깜빡거리는데,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아서. 언제나 신경안정제를 먹고 잠들었지. 자책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알약의 개수는 더욱 늘어났다. 오늘은 약을 먹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


누군가의 생각을 감각으로 만드는 일, 세상에 없는 것을 창조해내는 일, 물성을 만드는 일이 나는 퍽 즐겁다. 편집자라는 직업에도 이럭저럭 만족하면서 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20대 초반의, 모든 것이 차갑고 맑은 물처럼 새롭던 그때의 감각이 그리워. 첫 문장이 다음 문장을 불러내는, 문장과 문장이 노래처럼 엮여 울리는 마법 같은 순간이 그리워. 내가 쓴 문장의 그물로도 건져낼 수 없는 바다 같은 감정의 결이 그리워. 장면이 장면을 불러내고, 인물들이 소설 안에서 자유롭게 숨 쉬게 되는 그 순간이 그리워. 내가 길을 잃었을 때, 글이 길을 찾아주던 그 황홀한 미로가 그리워.


언제부턴가 나는 미로를 두려워하는 겁쟁이가 되었다. 내가 아닌 내 글을 믿고 담대하게 미로를 헤쳐 나가던 그때의 대책 없으면서도 무구한 용기를 되찾고 싶어. 지금은 비록 ‘글을 쓰고 싶다’라는 글을 쓸 뿐이지만.


언젠가 쓰일 내 글아.

너는 무엇이 될까.

노래가 될까, 박동이 될까, 선언이 될까.


‘쓰는 사람’이라는 말은 지금도 나를 살게 한다.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

글을 쓰고 싶어.

소설을 쓰고 싶다.


문득 ‘펜은 심장의 지진계’라는 김승일의 시가 떠오른다. 지금 이 글도, 내 박동의 여진을 기록하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


언젠가 쓰일 내 글에게, 힘주어 말하고 싶다.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았어. ‘쓰는 사람’이라는 말이 나를 언제나 살게 했으니까. 정말로 죽음을 생각하던 그 순간에도, 나를 살게 했던 건 언제나 ‘쓰는 사람’이라는 그 이름 하나였으니까.


나는 반드시 너를 불러낼 거야. 마법 같은 첫 문장이 수채화 물감 번지듯 번져 나가서 너의 뼈와 살을 만들고, 새로운 사람과 사랑을 낳을 거야. 너는 아주 사랑스러운 우주가 될 거야. 강하고 곧지만, 날카롭고 빛나지만, 그 누구도 해치지 않을 거야. 너는 작은 창에 가득 들어오는 빛처럼, 온 방 안을 밝게 비출 거야.


안녕. 아직은 태어나지 않은 내 소설아.

너에게 미리 인사를 건넨다. 잘 부탁해.

언젠가 내가 다시 첫 문장을 시작하게 될 때,

너의 담대하고 무구한 용기로 나를 이끌어 주길 바라.


나는 너를 믿어.

내가 글을 만들고, 글이 나를 만들리라는 것을 믿어.

너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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