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 3주년 특집 <e-책보고> 13호 시민 작가 참여
서울책보고 웹진 <e-책보고> 13호에 시민 작가로서 참여하여 실린 글입니다.
2021년 6월의 첫째 주, 오랜만에 그리운 친구를 만나러 잠실나루로 향했다. 친구는 나에게 책을 좋아하지 않냐며 근처에 멋진 책방이 있으니 여기까지 온 김에 들러보자고 권했다. 그저 규모가 크고 예쁘게 꾸며놓은 일반적인 서점일 거라고만 생각하고 가볍게 끄덕였다. 안일했던 생각은 이내 바뀌었다. 역 앞 상가를 지나고 건널목을 건너니 수많은 책으로 내외부를 장식한 ‘서울책보고’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직사각형의 진회색 건물은 겉에서 봐도 꽤 넓어 보였다. 출입문으로 향하는 동안, 깨끗하고 투명한 유리창 너머 차곡차곡 나열된 오래된 책들과 그 옛날 헌책방 풍경을 담은 흑백사진을 보았다. 마치 전시회에 온 기분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내부는 더 완벽하게 내 취향이었다. 중앙의 길쭉한 통로를 따라 부드럽게 흐르듯 나열된 아치형 서가는 마치 안락한 동굴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무수히 많은 책이 빈틈없이 꽂혀 있었다. 먼저 온 손님들이 이 커다란 책의 동굴을 배경으로 쉼 없이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마구 호들갑을 떠는 내게 친구는 기념 삼아 예쁜 사진을 찍어주겠노라 말했고, 그렇게 책보고와의 추억을 한 장 한 장 카메라에 담았다.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데스크 근처 커다란 원통형 기둥에 북큐레이션 코너가 눈에 띄었다. 그중에서도 ‘생년문고’가 인상적이었다. 고운 포장지 아래로 각 해의 초판 발행본이 들어있다고 했다. 매 시즌 생년 연도와 큐레이션 테마가 정해지고, 책보고 담당자가 그것에 맞추어 직접 헌책을 엄선한다. 그리고 꼼꼼하게 소독한 후 정성스레 포장한다. 구매자는 큐레이션 구성 주제만 알 뿐 정확히 어떤 책이 들어있는지는 포장을 풀 때까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더욱더 기념적이고 하나뿐인 선물 같은 느낌을 준다. 꼭 이 서비스를 맛보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아쉽게도 당시에는 내가 태어난 해로 구성된 꾸러미가 없었다. 나는 애써 수줍음을 감추고 데스크의 직원분께 다가가 ‘1991년’ 테마는 언제쯤 나오냐고 물었다(그렇다. 웹진 4월호에 실린 그 사람이 바로 나다). 직원분은 친절하게 응대해 주셨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서울책보고 공식 SNS에서 ‘1991년 생년문고’에 대한 게시글이 업로드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나에게 <익선동 옥상방> 콘셉트로 꾸려진 총 5권의 아름다운 헌책이 레트로한 달력지에 쌓여 찾아왔다. 이는 내 생애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 중 하나로 손꼽힌다.
나는 행여나 책이 상할세라 조심스레 꾸러미를 풀었다. 시집, 미술서, 아동도서, 1991년 겨울호의 실천문학과 문예중앙이 들어있었다. 세월은 흘렀으나 여전히 섬세한 감정을 전달하며 마음을 울리는 구성이었다. 갓 구운 빵처럼 노릇하게 변색 된 헌책은 특유의 감성을 뿜어냈다. 이후, 여름 정기구독 ‘월간 서울책보고’와 또 다른 테마의 ‘1991년 생년문고’, 한여름 더위가 사그라들 때쯤 ‘절기문고’, 크리스마스 에디션으로 나온 ‘랜덤박스’ 등, 여러 북큐레이션 서비스를 통해 책보고를 다시 만났다. 내게로 온 오래된 책 속 갈피에 적힌 옛 주인의 깊은 사유가 담긴 짤막한 메모나, 소중한 누군가에게 마음을 담아 표현한 메시지를 발견할 때는 우연히 친한 지인을 마주친 것처럼 유독 반가웠다. 이제는 익숙한 보라색 박스와 담당자님의 친근한 손편지는 일상 속 소소한 기쁨이 됐다. 나는 지친 하루 단 몇 분이라도 느릿느릿 책보고의 보물로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이는 곧 마음속에 따스한 양분으로 녹아들었다.
만약 내가 책보고를 몰랐더라면 과연 이 귀한 책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을까?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헌책의 소중함과 귀중함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베스트셀러 코너만 뒤적거리고 좋아하는 장르로만 편식했던 책 생활이 한순간에 전환점을 맞이했다. 다양한 분야의 서적은 물론 고전의 중요성과, 육신은 영면했으나 그 정신은 고결하여 아직도 뭇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옛 시절 작가들의 매력을 한껏 깨달은 것이다.
대형서점과 인터넷 구매가 활성화된 시대에 점차 사라져가는 헌책방을 한데 모아 뜻깊은 문화공간을 창출해낸 책보고에는 아주 많은 책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이 모든 책이 여기에 오기까지 오랜 여정을 보냈다는 사실이 더욱 뭉클하게 느껴진다. 단순히 오래된 중고책을 판매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시간을 타고 흘러온 모든 역사와 기록과 문화를 공유하는 곳이라는 점이 가지는 놀라운 의미성이란. 각각의 책꽂이는 머물거나 흐르는 시간으로 고스란히 부드러운 궤적을 그린다. 단종된 추억의 희귀도서는 물론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해외도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저명한 지식인들이 기증한 진귀한 책도 특별 서가에 사뿐히 자리 잡고 있다. 그동안 세상에 존재감을 드러내기 힘들었던 여러 독립출판물도 반짝반짝 당당하게 자신을 뽐낸다. 이외에도 부모님께서 열심히 공부하라며 사주었던, 친구에게 생일선물로 받았던, 연인이 저를 잊지 말라며 주었던,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잃고 잊었던 소중한 책들이 아치형 서가를 빼곡히 채운 채 다시금 함께할 누군가를 기다린다. 어쩌면 나의 손을 거쳤던 바로 그 책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일반 서점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이 세련된 중고책방에서 완연히 느낀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고, 좋아하는 눅눅한 책 내음을 한껏 만끽하며 비치된 독서 테이블에 앉아서 꼭꼭 씹어 읽는다. 자유롭고 편안하다. 오래된 책은 낡고 헌 책이 아니라, '시대정신과 사람의 체온을 품은 유기체'라고 자신 있게 표현하는 서울책보고. 이곳에서 헌책은 그야말로 ‘보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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