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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빛 Jun 14. 2020

『희생양』_르네 지라르#3

지라르의 성서 텍스트 분석-세례 요한의 참수/갈라진 사탄

5.헤롯왕과 세례 요한 

우리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한 것이다. 내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할 때, 그가 원하는 것을 내가 소유하기를 원함에 따라 그 타인은 나와 그 대상 사이에 끼어든 장애물로 보이게 되고, 나와 그는 경쟁관계로 들어선다. 내 욕망의 모델이 이웃사람과 같이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일수록 욕망의 대상은 내가 실제로 취할 수 있는 것이 되고 탐욕과 경쟁심이 더 높아지기 마련이다. 헤롯 왕이 자신의 동생 필립보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욕망하는 것도, 헤롯 왕이 필립보를 자신의 적수-경쟁자로 여기는 것도 이와 같은 원리에 의해 설명 가능하다. 


 경쟁의 발생 단계에서, 경쟁심이 완화되거나 다른 모델을 향하여 진정되지 않으면 우리는 상호 경쟁, 즉 경쟁이 계속해서 강화되는 관계로 들어서게 된다. 이렇게 되면 내가 그의 욕망을 모방하는 중개자도 나의 욕망을 모방하여 욕망의 크기는 커져만 간다. 그러면 나는 또 그의 것을 더 많이 욕망하게 될 것이다. 이 이중대칭 작용에 의해 우리는 모두 서로에 대한 모델이자 경쟁자가 된다. 주체-중개자-대상으로 되어있던 모방의 삼각형은 욕망이 갈수록 더 빨리 더 세게 돌아가는 모방의 원으로 변하고, 얼마 안 가서 마주보고 대결하는 두 사람의 경쟁자만 남게 된다. 


 서로를 모방하면서 가까워진 경쟁자들은 점점 더 똑같아져간다. 점차 똑같은 욕망, 몸짓, 공격성, 폭력, 강박관념을 갖게되다 보니 결국 행동이나 생각에서 차이가 사라진다. 이를 적대적 결합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모두들 상대방의 욕망을 표절하고도 자기 욕망의 우선권을 주장하면서 상대방을 이기고 헐뜯으려고 애를 쓴다. 대치하는 가운데 서로 자리를 바꿔도 될 만큼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정작 경쟁자들 본인은 모른다. 


 르네 지라르는 헤롯 형제의 싸움을 두고, 이 형제가 과연 닮았기 때문에 경쟁에 빠져든 것인지, 아니면 경쟁에 빠져 서로 같은 것을 욕망하는 과정에서 닮게 되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헤로데는 실제로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는다. 동생을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경쟁이 심화되면서 정작 대상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현상 속에는 또 하나의 진실이 들어있다. 우리가 원하던 대상을 획득하거나 희망하던 상태에 도달해도 만족은 오래가지 않고 거의 필연적으로 실망이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라 마지않던 대상도 일단 소유하고 나면 광채가 사라진다. 다른 이가 소유하고 있을 때 후광을 내뿜던 대상을 획득했다고 해서 자아가 확장되거나 즐거움이 커지는 것이 아니며, 기대했던 만큼의 극적인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처음에 기대했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세례 요한이 헤롯 왕에게 경고했던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실제로 헤롯은 결혼의 합법성 여부를 지적하기보다는 그 욕망의 해로운 결과에 대해 초점을 맞춰서 경고한다. “우리는 그들이 그들의 모방 욕망을 조심하도록 경계시키면서 그들이 폭력을 포기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한 것이다.” 


 결국 헤로데는 예언자의 경고를 따르지 않고 사람들도 그의 예를 따르기 때문에 욕망은 자꾸 새끼를 치고 확대되어 나간다. 이 텍스트의 모든 사건과 세부사항들은 이 욕망이 지속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 이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경쟁의 상승 작용과 경쟁심이 격화되면서 그 결과 차이 소멸현상이 벌어진다. 이 차이 소멸 현상은 개인들 간의 대치와 대립을 더 많이 만들어내면서 르네 지라르가 ‘모방 위기’라고 부르는 상황으로 몰고 간다. 우리는 경쟁자를 자신의 행복의 실현을 가로막는 부당한 박해자로 여기게 되고, 처음의 경쟁심은 격렬하고 파괴적인 의지로 변질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좌절시키고, 전복시키고, 압도하고, 격리시키고, 지배하고 심지어는 파멸시키고자 하는 의지 말이다. 애초의 욕망은 사라지고 욕망이 낳은 경쟁만 남게 되는 것이다. 


 헤로디아 또한 세례 요한에 의해 부정당하고 거부당했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에게 매력을 느낀다. 그럼으로서 그를 모방한다. 결국 이 욕망은 ‘모방 위기’를 거치면서 파괴의 욕망으로 변하게 된다. 결국 헤로디아는 요한을 죽이고자 마음먹는다. 욕망의 메커니즘은 항상 우리들로 하여금 획득하기 더 힘든 대상을 추구하도록 부추긴다. 대상은 획득하기 힘든 것일수록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우리의 채워지지 않은 욕망은 장애물처럼 보이는 라이벌 앞에서 끝없이 격화된다. 이러한 욕망의 격화는 극단적인 폭력과 증오, 심지어 살인까지도 가능한 물리적 공격으로 이어질 정도의 경쟁을 부추길 수 있다. 에밀 졸라의 <나나>에서 뮈파 백작은 자신이 결코 나나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나를 소유한다는 희망을 잃은 그는 “천박한, 내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나나의 목을 조른다. 이것은 스스로에게서 나나를 앗아가는 행동인 동시에 모든 경쟁자들에게서 나나를 빼앗아오는 행동이기도 하다. 모방 위기가 극에 달하면 전면적 멸시와 절대적 사랑은 하나가 된다. 헤로디아 또한 이러한 원리에 의해서 세례요한을 죽이고자 마음먹는 것이다. 


 그 방법은 딸인 살로메를 이용하는 것이다. 살로메는 어머니의 욕망을 모방해서 ‘세례 요한의 목’을 원한다. 결국 처음 헤롯의 모방욕망은 새끼를 치고 확대되어 나가 모든 사람들을 전염시킨다. 욕망은 항상 전염성이 있고, 모방된 욕망은 돌림병처럼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파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방 욕망의 전염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 빠지게 한다. 이때 욕망을 전염시키는 매개체이자 제의적 의식은 바로 살로메가 추는 춤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모든 사람을 파멸시킬 수 있으므로 군중은 희생양을 매개로 하여 폭력을 한데 수렴시킨다. 이때 희생양은 헤로디아의 음모에 빠진 세례 요한이며, 군중은 만장일치로 그를 죽일 것을 요구한다. 만장일치로 살인을 원하는 군중이 있으면 결정은 항상 그 군중을 따르게 마련이다. 이들로부터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는 헤로데는, 이 군중들의 결정을 어쩔 수 없이 인가할 수밖에 없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일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변하는 것이다.     


6. 갈라진 사탄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일화, 예수가 게라사에서 악령을 쫓아내는 일화, 예수가 사탄에 대해 말하는 일화 역시 한결같이 ‘희생양 메커니즘’을 폭로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례로 예수가 사탄에 대해 말하는 일화를 살펴보자. 이 일화는 예수 스스로가 추방이니 악령이니 하는 말을 쓰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의에 찬 사람들과의 토론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중요한 텍스트인데 세 권의 공관 복음서에 다 들어있다. 다음은 그 중 의미가 가장 풍요로운 마태오의 것이다. 예수는 이제 막 악령 들린 사람을 치유하였다. 군중들은 그를 칭송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바리사이인>, <율법학사>라고 불리는 종교적인 엘리트들도 들어있다. 이들은 예수의 치유를 의심하고 있다.     


 “그러자 모든 군중이 깜짝 놀라며 <이 사람이 혹시 다윗의 자손이 아닐까?>하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바리사이인들은 이 말을 듣고 <그는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내고 있는 것이다>라고 헐뜯었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알아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싸우면 망하고 어느 동네나 집안도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지탱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탄이 사탄을 쫓아낸다면 그 나라는 이미 갈라진 것이다. 그래서야 그 나라가 어떻게 유지되겠느냐? 또 내가 너희의 말대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면 너희의 대가들은 누구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 사람들이 너희의 말이 그르다는 것을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예수가 한 첫 번째 말에서 너무 당연하지만 진부한 원칙을 끄집어낼 수 있다. <갈라진 나라는 절대 오래가지 못한다>라는 일종의 격언이다. 


 그 다음 예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그러므로 사탄이 사탄을 쫓아낸다면 그 나라는 이미 갈라진 것이다. 그래서야 그 나라가 어떻게 유지되겠느냐?> 


 성서는 우리의 결론을 요약하고 있으며 우리가 추출했던 원리, 즉 인간 사회의 설립을 위해서 폭력(사탄)은 다른 폭력(사탄)에 의해 추방되고 있다는 폭력의 원리를 또렷이 형상화하고 있다. 


 갈라진 나라는 절대 오래가지 못한다는 말은, 어떤 사회든지 모방 욕망,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경쟁 때문에 갈라지게 된다(내분에 휩싸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회는 서로가 서로를 추방시키는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쉽게 말하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회는 이러한 초기의 폭력들로 야기된 무질서를 제거하기 위해 더 강한, 다른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 무질서한 폭력들을 종식시키는 강한 폭력은 희생양을 살해하여 국가를 설립하는 초석적 폭력을 의미한다. 그것이 사탄으로 사탄을 쫓아낸다는 말의 의미이자, 동시에 이것은 희생양 메커니즘을 비유하고 있다.

 이것은 다음에 나오는 구절에 의해 더욱 명료해진다. 


 “또 누가 힘센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그 세간을 빼앗아가려면 먼저 그 힘 센 사람을 묶어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 그 집을 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처음 나오는 힘센 사람이란 그 집을 차지하고 있는 합법적 소유자, 혹은 적어도 처음으로 점령하고 있는 자를 의미한다. 이 합법적 소유자는 기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무질서를 야기하는 폭력이자 사탄이다. 이 첫 번째 사람을 지배하는 더 힘센 자는 무질서를 종식시키는 강한 폭력, 희생양을 죽이는 초석적 폭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힘이 센 다른 폭력은 또 다른 사탄일 뿐이다. 그러나 이 두 번째 폭력은 무질서를 종식시킨다는 이유로 인해 성스러움을 부여받고 ‘성스러운’ 폭력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내가 너희의 말대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면 너희네 사람들은 누구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낸다는 말이냐?>고 묻는 질문은 그들도 바로 <사탄을 통해서>, 폭력을 통해서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가리키는 것이다. 


 지금까지 예수는 스스로의 내분(모방적 경쟁)과 희생양 메커니즘이 인간사회의 파멸 원리일 뿐 아니라 설립 원리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성서는 사탄은 모든 나라의 원리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사탄이 그런  원칙이 될 수 있는 까닭은 모든 문명이 서로가 서로를 추방시키고 있는 폭력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나라, 모든 마을, 모든 가정은 다 실제로 갈라져 있으며, 바꾸어 말해 인간의 모든 사회는 파괴적인 동시에, 설립적인 폭력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이렇게 희생양에 대한 폭력으로 세워진 나라는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 뒤, <그러나 나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예수가 위와 같은 말들을 통해 희생양 메커니즘을 폭로함으로서 이것과 근절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러한 말들이 전부 ‘비유’로 이루어진 까닭은 무엇일까? 비유를 뜻하는 paraballo라는 말은 집단 살해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parabello라는 말은, 그들의 폭력 욕구를 만족시켜주기 위해 무리를 지어서 음식물 같은 것을 희생양이나 사형수에게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인간의 언어는 다른 문화 제도와 함께 집단 박해에서 나왔음이 틀림없다. 집단박해에서 ‘먹이를 던져주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왜곡과 변형작용을 거치면서 ‘비유’라는 뜻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가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독자들에게 박해에 왜곡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 그것을 알아채도록 하는 형식이자 장치이다. 또한 이렇게 paraballo, 즉 메타포에 의지하는 것은 그 무리들이 예수에게 덤벼드는 것을 막는 효과도 있다.      


 이로써 사탄의 의미도 명료해진다. 성서에서 ‘사탄’이라는 상징은 바로 사회 속에 감추어진 폭력의 메커니즘이자 이 폭력을 부추기는 모방욕망이라는 것이다. 사탄은 우리가 십계명의 마지막 금기, 곧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라”라는 금기를 위반하도록 달콤한 말들을 지어낸다.  금기가 우리를 억압하는 족쇄이며, 우리는 이 금기를 깨고 우리의 기호를 따를 때에야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유혹한다. 하지만 이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 우리는 모방의 사이클 속에 빠지게 된다. 그 다음부터는 자연스럽게 폭력의 반복이 이어진다. 사회가 무고한 희생양에 대해 반복적으로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 망각되는 일들이 벌어진다.


 악마가 모방욕망을 상징하는 것은 악마가 하느님을 흉내내고 있다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탄은 모방경쟁을 부추김으로서 인간들간의 분열을 만들어내는 힘이기도 한 동시에, 이러한 무질서를 하나로 수렴시켜 희생양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힘이기도 하다. 결국 성서에서 사탄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을 분리시키고 있는 힘이나 희생양에 대한 만장일치적 살해에서 사람을 한데 모으는 힘은 결국 같은 힘, 사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사탄은 희생양을 통해 문명의 시작을 가능하게 한 <처음부터 살인자>가 된다. 또한 사탄은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의 아버지>로서 이러한 폭력을 왜곡하고 속이는 역할도 한다.


 사탄, 모방욕망은 자율적 실체가 아니라, 신들림을 통해서만 그가 존재하는 데 필요한 숙주를 얻을 수 있다. 모방욕망의 부추김에 사람들이 저항하지 못할수록 악령이 살 수 있는 숙주는 그만큼 많아진다. 사탄은 스스로가 찬미하고 있는 대상, 그러나 사탄을 거부하고 있는 모델인 신으로 변하기를 원한다. 사탄을 찬양하는 것은 이러한 모방욕망을 찬양하는 것이고, 이런 환상을 갖고 있는 동안은 희생된 뒤 성스러움이 부여된 가짜 신을 만들어낼 수는 있다.  


 요한이 <처음부터 살인자인> 사탄을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버지>라고 표현할 때 그는 바로 이러한 메커니즘에 대해 폭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예수 수난은 희생물의 무죄를 보여줌으로써 이 거짓의 신뢰도는 떨어지고 만다. 결국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날 마침내 박해의 서사는 총체적인 파멸을 맞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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