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와 태양>을 읽고
멀지 않은 미래에 사람들은 AI를 발달시켜 인격을 갖춘 로봇 친구를 만든다. 아티피셜 프렌드(AF)라고 하는 이 로봇은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며 아이의 성장을 돕는 역할을 한다. 소설의 주인공 클라라는 이러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AF이고, 조시라는 여자아이에게 선택되어 우정을 쌓게 된다.
‘사람’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진 인간이라고 정의 할 때, 조시와는 달리 사회는 AF에 대해서 적대적이고, AF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물론 AF는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클라라는 인간과 같은 감수성을 가지고 있고, 슬픔이나 기쁨 같은 감정을 느끼고, 언어를 사용해 타인과 소통하고 공감하며, 심지어 종교와 흡사한 믿음까지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이들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데, 이는 이들이 사회에서 ‘사람’으로서 현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사회의 도덕의 기초에 있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절대적 환대의 원리이다. 즉 태어나는 모든 인간 생명에게 자리를 주어야 하고, 어떤 명목으로도 이 자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사람의 신성함이란 바로 이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사회 안에 자리가 있다는 것이며, 신성하다는 것은 이 자리에 손댈 수 없다는 뜻이다.”(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사람이 된다는 것은 환대받는 것을 의미하고, 사회 속에서 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클라라는 어떠한 장소도 갖지 않는다. 이 로봇은 상징적인 차원에서 장소가 박탈된 것이다. AF 매장에서 클라라는 다른 사람에 의해 계속해서 옮겨지고 자신이 만족하는 자리에 있는 것을 방해받는다. 매장은 유리창으로 막혀 있어 공간적으로 제약되어 있으며, 횡단보도, 대로로 이루어져 있어 교통의 흐름이 왕성한 바깥 세계와 대조된다. 즉 유리창 내부의 매장이라는 공간은 움직임이 제한된 공간이며 유리창 밖의 일에 개입이 불가한, 사회의 바깥이다.
클라라는 조시를 통해 사회 내부로 진입한다. 조시라는 낯선 소녀가 클라라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친구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고, 때로는 안아주기도 한다. 비록 클라라는 인간이 아닌 로봇이지만 조시와 그녀의 어머니에게는 환대받는다. 클라라는 친구가 없는 조시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조시는 클라라에게 가족이 되어준다.
하지만 클라라에게 제공되는 환대는 조건적이다. 우선, 클라라는 인간 집단에 있을 때 외부에서 온 이방인일 뿐이다. 이방인은 집단이 요구하는 행동규범을 따라야 하고, 만일 그러한 규범에서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 환대는 철회된다. ‘교류 모임’에서 아이들은 클라라에게 노래를 시키나, 클라라는 이를 거절한다. 그 뒤에는 인사하기를 요구하나 또 다시 클라라는 거부한다. 나중에는 한 아이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를 맞춰보라는 요구를 받는데 이마저도 거부한다. 클라라는 “도와드릴 수 없어 죄송합니다.”만을 반복한다. 급기야 아이들은 이러한 클라라를 던지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들의 적대감을 해소하려고 한다.
직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들의 모습은 마르셀 모스가 <증여론>에서 이야기했던 증여와 선물의 순환을 보여주는 것 같다. 어린 아이들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의례이자 실리로서 끊임없이 선물을 주고받고 답례하는 방식을 통해서 ‘관계’를 유지한다. 조시의 친구인 릭은 조시의 초대로 ‘교류모임’에 처음 가게 된다. 이때 릭은 이 집단에 있어서 이방인인데, 한 아이는 “환영한다는 뜻으로” “뭘 좀 주는 게 어때”라고 말하며 릭에게 초콜릿을 건넨다.
하지만 이들 아이들 간의 교환을 아무런 긴장 없는 하나의 형식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한 순간이라도 의례를 벗어나거나 충분한 선물을 줄 수 없다면(그 정도로 힘이 없다면) 곧장 적대감이 표면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릭이 초콜릿이라는 선물을 받지 않자 한 아이는 “저 애는 왜 초콜릿을 안 먹지?”라고 따져 묻는다. 결국 클라라와 조시도 이러한 관계의 연장선상에 있는데 어느 한쪽이 이러한 교환의례를 수행하지 않을 때/ 없을 때 클라라에 대한 조시의 환대는 철회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환대란 결국 개인 또는 가족의 힘과 역량과 관련이 있다. 어느 사회에서 이방인을 받아들여줄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힘 있는 주류 집단이라는 것을 소설은 보여준다. ‘교류 모임’에서 이방인인 릭을 받아들여줄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팔이 긴 여자 아이를 주축으로 한 ‘향상’(유전자 조작을 통해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것을 의미)된 아이들이고, 이들 위에는 이들의 부모가 있다. 릭에게 “너는 여기 있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도 권력을 쥔 향상 된 아이의 엄마다. 그래서 ‘향상’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능력이 떨어져 권력을 쥐지 못한 사람들은 항상 사회의 주변부에, 이방인으로서 머물면서 사회 내부에 현상하지 못한다. 이는 AF도 마찬가지이다. 가족들이 AF인 클라라를 데리고 극장 안으로 갔을 때 클라라는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제지당한다.
“잠깐만” 46세 정도로 추정되는 등급이 높은 파란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러더니 조시와 신디를 보며 말했다. “너희가 이 기계를 극장에 데리고 들어가려고 그러니?”
“에? 그러든 말든 무슨 상관인데요?” 신디가 말했다.
“이 공연 표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니. 그런 좌석을 기계가 차지해선 안 돼. 이 이 기계를 극장 안으로 데려가겠다면 난 이의를 제기해야겠다.”
“무슨 권리로 남의 일에 참견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이 장면에 뒤이어서, “나는 클라라가 내 방을 혼자 쓰고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조시가 말하는 것은 사회에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장소가 부여되는 것은 같은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환대를 외부에서 온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문제로 살펴보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회 내부에서의 환대이다. 조시의 집안 내에서도 클라라는 무조건적으로 환대받지 못한다. 일정한 규칙을 지킬 때에만 가족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진다. 가족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도록 어두운 구석에서 냉장고를 바라보며 서 있’어야 한다. 또한 클라라는 ‘부엌에 들어오는 것’도 제재 당한다. 설사 부엌에 들어가더라도, ‘조시와 어머니와 같이 아일랜드 식탁에 앉는 대신 냉장고 옆에 서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가정부 멜라니아는 클라라가 자신의 옆으로 오면, “졸졸 따라다니지 말고 꺼져!”라고 면박만 준다. 이러한 혐오는 나중에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라도 내가 필요해지면 도우려고 방문 바로 앞에 서 있었는데 가 정부 멜라니아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에이에프. 항상 내 등 뒤에 있으니 소름끼 쳐. 나가.”
가정부 멜라니아가 ‘야외’라고 말했다. 나는 문 쪽으로 몸을 돌리고 조용히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집 밖을 말씀하신 건가요?”
“방 밖이든 집 밖이든 맘대로 해. 신호 보내면 빨리 돌아와.”
공간적인 차원에서 이 소설의 세계관은 인간에게 밖을, 로봇에게 안을 할당한다. AF는 집 밖을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다. 하지만 로봇의 자리가 집 안이라는 말이 곧 집이 로봇에게 속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AF는 공적으로 성원권이 없기 때문에 사적인 공간을 가질 수도 없다. 다만 인간의 사적 공간인 집에 그들의 소유물의 일부로서 속해 있을 뿐이다. 간단히 말해, AF는 물리적 의미에서 사회는 인간의 영역이고, AF는 여기에서 배제된다. AF 매장의 쇼윈도 바깥으로 보이는 직업의 세계와 활동적인 삶에서 배제됨으로써 클라라는 극장, RPO 빌딩 등이 있는 공적 공간으로부터 격리되었다. 결국 클라라는 기능이 다하고 돌봄로봇으로서 쓸모가 다해지자, 야적장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야적장은 ‘출입 엄금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붙어 있는’ 인간의 출입이 불가능한 장소이다. 이곳만큼 사회의 바깥을 더 잘 상징하는 장소가 있을까.
이 사회에서 AF는 사회 안에 어떠한 적법한 자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AF는 스스로를 비가시화한다는 조건으로, 물리적인 의미에서 사회 안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받고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 아니 어떤 로봇을 조건부로만 구성원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정상과 비정상)은 매순간 환대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공동체의 구성원을 외부적인 요소(옷차림, 모자, 외모, 피부색)로 확인할 수 있었기에 환대할 사람과 환대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노예)을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시대에서 우리는 외부적 조건만으로 사람을 알아차릴 수 없다. 특히, 미래로 가면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로봇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장소를 내어줄 것인가? 아니, 이렇게 물어보자. 로봇을 사람처럼 대할 것인가? 단순히 아니라고만 할 수 없다.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존재가 탄생했기 때문에. 환대의 경계를 넓히고, 절대적 환대에 대해 모색해봐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하지만 절대적 환대란 그리 쉽지 않다.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 복수하지 않는 환대란 신체를 가지고 정념을 가진 인간임을 포기하란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으로 던져진 우리들은 실상 태어난 순간부터 환대를 받았던 샘이다. 우리가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환대의 빚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고, 환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장소와 같은 구성원이라는 상징적 자리를 주지 않겠다는 말은, 그 사람(또는 그 로봇)을 죽었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환대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지 이야기가 필요하고, 이 소설은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