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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빛 Jul 27. 2021

이슬아는 생각보다 강했고, 남궁인은 생각보다 약했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를 읽고

이 책은 이슬아와 남궁인이 주고받은 편지들을 엮어 책으로 만든 서간집이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들의 내밀한 생각들이 오롯이 전달되어 온다. 무대의 조명이 둘만을 비출 때, 독자는 둘에 대해 더 집중하게 된다. 둘이 독자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일차적인 청자를 편지를 받아보는 수신자라고 상정하는 서간문만이 갖는 특징 때문에 내밀한 이야기를 더 서슴지 않고 할 수 있게 된다. 서로에 대해 물어봐주고, 대답하고, 걱정해주고, 장난을 치는 과정에서 관심을 가져주는 상대방이 있다는 기쁨은 저자들로 하여금 독자의 존재를 잠시나마 잊게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더 솔직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털어놓을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독자 입장에서는 이 둘의 성격을 좀 더 잘 관찰할 수 있는 장점을 맛 볼 수 있는 동시에, 오해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누구의 잘못이 더 큰 것인지 따져 묻는 심판자가 되는 즐거움 또한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들 사이에는 서로가 다른 만큼 서로에 대한 오해가 있다. 이슬아는 아무런 간판도, 울타리도 ‘빽’도 없이 글쓰기를 시작했다. 흙수저이지만 자신의 힘으로 스타작가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다. 그래서 남궁인에게 있어 이슬아는 ‘모든 규범을 거부하는 세계의 슈퍼스타’ 같은 존재이다. 반면 남궁인은 교육열 높은 8학군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엘리트이다. 이슬아는 남궁인을 ‘좋은 시계를 차고 좋은 차를 몰고 비싼 레스토랑에 다니고 자기 손으로 할 줄 아는 요리라곤 오일파스타밖에 없는 사람’이자 ‘창업을 했다가 망했지만, 큰 타격이 없을 정도로 집에 돈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고 오해한다. 그만큼 남궁인이 여유로워 보이고 풍요로워 보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둘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다른 성별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여성과 남성은,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두 사람은, 모범생과 이단아는, 흙수저와 금수저는, 문과와 이과는 서로 안맞게 마련이라고. 말이 안통하고 생각하는 방식도 다를거라고. 그래서 소통 불가능하며 친구는 될 수 없을거라고.’




이 둘 사이에 오해가 없는 것이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 둘이 바라보는 세계는 대척점에 있을 것이고, 이 둘에게는 건널 수 없는 망망대해가 있다. 그러나 우정은 동시에 이 망망대해라는 가능성의 세계를 매개로 하여 시작된다. 무수히 많은 오해가 있을 수 있지만, 이 오해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우정이 발전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정을 가로막는 것임과 동시에 우정의 가능하게 하기도 하는 이 오해의 본질은 무엇일까. 둘은 서로에 대해 무엇을 그렇게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고, 이 오해는 어떻게 해소되는 것일까.    


             

이슬아에게 있어, 남궁인은 멋있는 사람인 동시에 웬지 좀 구리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남궁인은 확실히 강한 사람이다. 그가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대한 면역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데에는 많은 수술을 감행하며 두려움에 익숙해졌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슬아는 이것과 반대다. 이슬아는 스스로 겁이 많다고 인정한다. 공포 영화는 전혀 보지 못한다. 잔인한 것은 물론이고 약간의 서스펜스조차 버겁다. 누군가가 쫓기거나 다치거나 죽는 장면이 나오면 고개를 숙인다. 그래서인지 응급실에서 일하는 자신의 모습은 상상조차 안된다고 말한다. 또한 그녀는 약하다. 유독 바보 같아지고 약해지는 부분이 누구에게나 있듯이 말이다. 엘리베이터를 혼자 탈 때면 이슬아는 물에 빠진 것처럼 숨이 안 쉬어지고 무섭다. 일종의 폐소공포증인데, 남궁인에게도 이런 부분이 있을지 궁금해한다. ‘아마 없지 않을까?’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 모든 강인함에도 불구하고 남궁인은 느끼하다. 마치 발신인만 강조되고 수신인은 흐릿해져 버리는 편지처럼, 그의 글은 자기 자신만이 드러나고, 자기 자신에게 너무 취해있기 때문에 느끼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두려움이라는 자신의 내면의 감정에 너무 천착한 나머지 타인에 대한 호기심을 잊었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이슬아는 생각한다. 남궁인은 내면의 힘은 강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에너지의 방향이 내면으로만 쏠려있다. 머릿 속에는 온통 자기 자신 뿐이다. 그래서 작가로서 어떻게 갱신을 할 수 있을까? 작가가 다음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의 틀을 깨고 나가 세계를 확장시켜야 되는데, 타인에 대한 호기심이 없다면 이것이 가능할까? 반대로 이슬아는 자신이 호기심이 매우 많다고 말한다. 특히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고, 그들과 우정을 쌓고 싶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배우지 않는 그녀는 너무나도 시시하기 때문이다. 우정을 쌓는다는 것은 우정을 쌓는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와 친구가 되고 싶다. 그래서 친히 insiders라는 그의 아이디의 뜻이 무얼까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가!



그녀는 그를 두고, 남에게 관심이 없다고 비난한다. ‘수신자 말고 발신자만 선명한 편지’를 쓰는 그는 자신에게만 모든 관심의 방향이 쏠려있고 남에게는 관심이 없는 인간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궁인은 느끼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한 동시에 남궁인은 친절한 사람이라고 한다. 아마 매사에 형식적으로 사람을 대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그가 연애 상대에게 ‘영혼 없다’는 소리를 그렇게 많이 듣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슬아가 남궁인을 두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오해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가 타인에게 호기심 갖지 않은 것은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라거나 ‘자기에게 너무 취해있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리어 남궁인은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기 싫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일에는 이제 신물이 나기 때문에 타인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은데 그들의 고통과 불행을 들여다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는 ‘행복하기 어려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들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면 그 자신 또한 불행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쩌면 남궁인은 이슬아가 생각했던 것 만큼 강하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기 싫어하는 것도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두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이슬아의 판단은 순전한 오해였던 것이다. 그는 연애할 때마다 두려움을 느끼고, 언젠가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거의 모든 것에 돈을 쓰지 않으며, 부모님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만큼 예민한 성정의 소유자이며, 범불안장애를 기저질환으로 갖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을 견디지 못할 만큼 여린 마음의 소유자이다. 그가 그토록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데에는 이런 사연이 있지 않을까. 



반면에 이슬아는 남궁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에도 폐소공포증을 느끼고, 차를 타고 지나치는 터널에서도 숨 막혀하고, 백화점 화장실에 숨어서 훌쩍거리며, 남궁인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고단함을 토로하며 엉엉 울어버리는 이슬아였다. 남궁인은 아마도 그녀가 약한 사람이라고 오해했을지 모른다. 항상 밝은 모습만을 보며 힘든 일이라고는 겪어보지도 않고, 극복할 수 있는 의지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슬아는 약한 사람이구나. 그러나 그녀가 ‘오해’에 대해 쓰면서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는 사람과 모른다는 말로 다가가는 사람. 세계는 이렇게도 나뉜다.”라는 말을 했을 때,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적어도 이슬아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타인에 대해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어떠했는가. 무수한 오해를 뒤로 남겨놓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시도하지 않은 채, ‘너는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또는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어’, 라고 안일한 판단을 해버린 채 도망쳐 오지 않았던가. 적어도 이슬아는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다가가는, 내면의 강인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렇게 표면적으로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님을, 남궁인 또한 편지를 교환하면서 깨닫지 않았을까. 



편지를 띄워놓고 답장을 쓰다가 좀처럼 나아가지 않는 밤, 남궁인은 이슬아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켰다. 들어가 보니 ‘운슬아’(운동하는 이슬아)가 튼튼한 다리와 올곧은 척추로 스쿼트를 하고 있었다. 남궁인은 자신도 운동하는 것처럼 힘을 주며 이슬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이슬아가 참 단정하고 올곧은 척추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예의 바르고 다정하며, 밤중에도 반듯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슬아였다. 남궁인은 그 때 ‘강건한 연재 노동자의 근육’을 보았다고 회상한다. 그 순간 남궁인은 깨닫는다. 이슬아는 새로운 우정에 진입하기 위해 올곧은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여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무한한 애정을 품었다가도 짐짓 몸을 바로 세워 맞서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그릇됨을 바로잡는 강직과 선의를 가진 사람이었다. 바른 자세에 있어서만은 집요한 이슬아야말로 강인한 ‘인간 이슬아’의 본질이었다. 이러한 강인함은 상대방에 대한 순수한 존경을 품고, 오해로부터 도망치거나 오해를 외면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나아가는 이슬아를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막과는 별개로 이 책 전체는 불균형하다. 주고 받는 글들만 보면 이슬아는 남궁인에게 관심이 많고 그의 이야기를 끌어내주는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둘이 정말 그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기 보다는 의도된 포지션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이를테면, ‘호기심 많은 이슬아’와 ‘타인에게 무심한 남궁인’은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라는 서간집을 만들기 위한 의된 컨셉이 아니냐는 말이다. 어쩌면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라는 제목을 정해놓고 그 뒤에 이둘이 이 컨셉에 맞추어 글을 주고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형식만 서간문이다. 



서간문이라는 진실을 담아야 하는 글의 진위성이 흔들린다는 점에서 이는 유효한 지적일 것이다. 아니면 책에서도 언급됬듯이, 이인삼각 경기처럼 둘이 짜고 치는 고스톱과 같은 합작물을 만든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이러한 포지션에서 오는 부자연스러움 때문에, 이슬아가 본인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에 대해 ‘더’ 궁금한 독자는 내심 아쉬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너무 무례하거나 너무 느끼한 법인데 정말이지 오글거리지 않는 방식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끌어낸다. (무례하지 않다고는 쉽사리 말하지 못하겠다.) ‘느끼함’이라는 작은 단어에서 시작한 ‘호기심 결여병(=자기 자신에 대한 과도한 관심 +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마지막 장 통계의 대미로 향해 나아가서 화룡점정을 장식하는 대미가 너무나도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아직도 지울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원래 모든 인간관계는 오해를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관계란 타인과 나의 다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인간관계인데 뭘 그리 새삼스럽게 오해를 전면에 내세우는지 모르겠다. 마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정말로 오해 없는 100프로 무결정의 순수한 관계를 바란 것일까? 이 둘은 원래 그렇게 순수한 사람인 것일까?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서간집 형식은 진부한 내용을 포장하기 위한 일종의 연막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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