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를 읽고
퇴행하는 남자와 성장하는 여자
ㅡ<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를 읽고
손과 리비도
장 피에르가 항상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장전된 총과도 같은 손은 남근에 대한 상징이자 리비도가 승화된 진정한 남성성에 대한 상징이다. 장 피에르는 자신의 손을 숨김으로서 성적 욕망을 숨기는 것이며, 성인 남성이라는 책임을 지는 주체로서의 역할을 거부(=퇴행)한다. ‘나’ 또한 자신의 성적인 욕망이 좌절될 때 그것을 성장의 계기로 삼기보다는 나이 많은 남성과의 사랑이라는 판타지로 자신을 방어하려 하는 퇴행적인 심리 상태를 보인다. 그렇기에 퇴행이라는 키워드는 ‘나’와 ‘장 피에르’를 엮어주는 공통분모임과 동시에 ‘나’가 ‘장 피에르’처럼 나이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나’는 퇴행의 상태를 벗어나 결국에는 성숙하게 되지만, 장 피에르는 그 상태에 머무른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소설은 어떤 유부남 연구자가 “스물한살짜리를 유혹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에서, ‘나’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나’는 유부남 연구자에게 학부생 애인이 있다는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게 된 후 “그에게 가졌던 희미한 관심이 순식간에 명확한 경멸로 변해가는 것”을 감지하며 그간 그로부터 느껴졌던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리운 기분”의 실체를 마주하게 된다. “장 피에르. 그는 장 피에르를 닮았던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녀는 대학교 교양과목을 담당했던 교수 장 피에르와 자신에게 얽힌 과거를 되돌아본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이 소설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손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이다. 장 피에르를 만나러 프랑스에 간 ‘나’와 ‘연수’는 우연한 계기로 서점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연수는 남자의 성기 사진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잡지를 들고 온다. 연수는 ‘나’에게 “이거 귀엽지 않니?”라고 물어보지만 ‘나’는 경악한다. 그리고 “잘못 만지면 바이러스에라도 감염될 것처럼 그 부위에 손이 닿지 않도록 질색하며 책을” 다룬다. 마치 손이 잡지에 닿는 것만으로도 성적인 교류가 생기는 것처럼 여기는 이러한 태도는 손이 이성의 신체에 접촉하기 위한 수단임과 동시에 성적인 것을 은유하는 신체부위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은교는 “낡은 롱코트 주머니에 장전된 총을 숨기고 다니는 어느 누아르 영화 속 주인공처럼”항상 주머니에 손을 꼽고 다니는 장 피에르가 “저항의 불씨를 가슴 속에 숨기고 세속을 견디듯이 살아간다.”라고 한다. 하지만 장 피에르가 숨기고 있는 것은 저항의 불씨라기보다는 자신의 성적 욕망이다. "굉장한 집안의 자식"인 부르주아지 출신으로서 "감옥에 가는 대신 파리에 가"는 것으로 부모에게 순종한 그가 진정한 저항의 의미를 알 리 없기 때문이다. 남성이자 부유층에 속한 그는 항상 기득권에 속해 있었으며 잠시 반항을 하는 듯 보였으나 곧바로 제도권으로 편입된다. 요컨대, 그에게 있어 저항은 그가 입은 명품 옷처럼 일종의 장신구이자 사치품이다. 그렇다면 그런 그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그의 욕망이 사회가 요구하는 상식에서 벗어났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신의 욕망을 숨겨 무해한 존재로서 자신을 포장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10살이나 어린 자신의 제자와 성적인 관계를 갖겠다는,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욕망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 제자를 유혹하기 위해 자신을 무해한 존재로 포장하려는 그의 검은 속내는 대학 내에서는 본색을 드러내지 않다가 제자들이 술을 잔뜩 먹고 취했을 때 드러난다. 그는 주머니에서 자신의 손을 꺼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소에는 여자아이들 옆에 앉지 않는”등의 행동을 하며 자신의 욕망을 숨긴다. 그러다가 ‘나’나 다른 친구들이 “너무나 취해” 버리자 “연수의 무릎과 허벅지 쪽에 손을 가져다댄다.”
손이 성적인 기호로 읽힐 수 있다면, 장 피에르의 손은 남성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린 여성에 대한 장 피에르의 집착은 손으로 표상되는 남성성(=어른 남자)이라는 기호를 드러내는 것을 거부하는 그의 제스처와 맞닿아 있으며 이는 퇴행과도 같다. 퇴행은 어떤 이유로 인해 충동을 충족시킬 수가 없어 자아(自我)가 위기에 처하게 될 때, 심리적으로 이전 성장단계로 되돌아가면 정신적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가 “강사나 교수라기보다는 영원히 졸업하지 않으리라 결심한 나이 많은 학생”처럼 “자신을 소년으로 생각”한 것은 오은교가 지적한것처럼 탈권위주의를 표방하여 교육자로서 책임을 방기한 것이기보다는 퇴행하기 시작한 장 피에르의 발달장애를 의미한다.
그는 “어떤 경우라도 열일곱에서 스물세 살, 스물네 살까지가 우리 삶에서 가장 추한시절이라는 걸 머릿속에 담아두어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한 환멸을 느끼는 듯하면서도, “명심하라. 반드시, 네가 싫어하던 그 무엇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어른이 되려는 욕망을 포기한다.
성적 욕망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고 억압된 상태에 머무는 것과 동시에 이러한 욕망이 외부세계를 향해 승화되지 못하는 것도 퇴행의 명백한 증거이다. 프로이트는 리비도라고 하는 성적 욕망이 승화됨으로써, 사회적 관계나 성취 등을 비롯하여 인간이 바람직한 것을 추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악수나 인사를 할 때처럼, 주머니 밖으로 나온 손이 리비도의 승화를 상징하고 ‘인간적인 교류’를 위한 수단임을 감안할 때, 그의 손은 이러한 기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때로 그의 손짓은 성난 상대를 진정시키는 것 같기도 해서 앞으로는 자신을 알은척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사를 하지만, 그 인사의 의미는 알은체하지 말아 달라는 무언의 요구인 것인데, 이때의 손은 인간적인 교류를 이어나가기보다는 인간적인 교류를 되레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장 피에르의 퇴행은 예술의 이름으로 포장된다. 그가 만든 영화는 “누군가 목을 매달기 위해 마지막으로 발을 디딘 의자가 주인을 잃고 홀로 남겨졌다가 새로운 주인들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의자가 여성에 대한 은유임은 명백하다. 장 피에르는 자기 우울을 변명 삼아 젊은 여학생들에게 이해와 연민을 호소하고 살갗을 붙여오며 지분거리는데, 이때의 여성은 장 피에르의 우울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마치 의자가 단순히 목을 매달기 위해 발을 디디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속 의자도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사물로서 단지 누군가가 머물다 가는 객체이자, 스스로의 의지로 주인을 결정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이렇게 자기 욕망의 배출구 기능밖에 하지 못하는 함량 미달의 영화들이 “부서진 사물의 보이지 않은 역사”, “연약한 식물 같은 내면”과 같은 낭만주의적 성향을 띠는 수식어로 포장됨으로서 한 남성의 추잡한 욕망은 신비화된다.
‘퇴행’이라는 공통분모
존 버거에 따르면, 미적 가치, 진실, 작가의 천재성, 형식, 취향 등 우리가 기존에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일반적인 기준들은 사실 예술 작품을 신비화하여 알 수 없는 것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가진 특정 지배계급에 의해 학습된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나’ 또한 한 명의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독립적인 생각을 갖지 못하고, 남성적인 시선에 의해 쓰여진 영화나 예술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추종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경향은 장 피에르와 같이 ‘나’ 또한 퇴행적인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연수’와는 달리 남성들이 선택하는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녀의 성적 충동은 번번이 좌절당하는데, 성숙한 상태로 진입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퇴행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남성에 대한 경멸을 가장하지만,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듯 남성들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인다. 코트 주머니 속에 손을 꼽고 다니는 장 피에르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영화 속 멋진 남성주인공을 연상시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은 그러한 이미지가 남성중심주의적인 영화에 의해 학습된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또한 옷속에 감춰진 자신의 가슴이 얼마나 성적 매력이 있는가를 보면서 성적으로 성숙해지고 성적인 매력을 어필하는 게 성숙의 지표라고 착각한다.
‘나’의 퇴행은 연수와의 관계 속에서 변주되어 나타난다. 자신이 가진 이성에 대한 욕망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동성의 여자친구 ‘연수’를 동경하거나 꽁무니를 쫓아다닌다. 만약 연수와 동등한 성인으로서 자신을 바라본다면, 단순히 그녀를 동경하거나 숭배하기보다는 그녀가 가진 고통과 아픔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미성숙했고, 자신의 좌절(장 피에르를 비롯한 남성들에게 성적인 매력을 어필하지 못한 것)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연수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다.
또한 ‘나’는 남성이 젊은 여자에 대해 성적으로 집착하는 롤리타적인 사랑에 대해 아무런 비판의식을 갖지 못하고 자신이 그 대상이 되기를 바란다. 스스로 주체의식을 갖지 못하고, 남성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다. 이 또한 퇴행의 일종으로서 자신의 충동이 좌절될 때, 부모의 품을 그리워하거나 부모를 찾아가는 욕망이 변형된 것이다.
성숙의 계기
그러나 장 피에르가 퇴행을 극복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미성숙의 상태에 머무는 것과 달리 ‘나’는 성숙해질 수 있는 전환의 계기를 맞는다. 어학연수를 가서,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된 순간, 영화에서 여성이 다뤄지는 방식이 '선택받는 여자'와 '선택받지 못하고 목격자로 머무는 여자'로 나눠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순간 예술에서 여성이 다뤄지는 방식이 수동적인 대상에 머문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이런 대상을 자처해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세월이 흘러서 연수가 이혼하고 그와 관련된 얘기들 듣게 되는 것도 ‘나’가 성숙해가는 과정의 하나이다. 가슴 확대 수술을 요구했던 전남편과의 짧은 결혼생활을 끝낸 연수는 문화센터에 다니며 글쓰기를 시도해볼 것이라 수줍게 말한다. “연수도 오랫동안 나처럼 뭔가를 창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그동안 까맣게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나’는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성숙했고 연수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며 그녀의 결심과 바람을 지지하고 북돋아주게 된다. 동시에 "우리는 기록하는 여자가 될 거야"라고 말하는 연수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여성은 이제 남성의 간택을 받거나 받지 못하는 여자가 아니라 자신이 겪은 일을 기록하는 한 명의 여자로, 남성의 욕망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행위 주체성으로부터 정의될 것이다.(오은교)
최종적으로 장 피에르에 대해 “별 것도 아닌 게”라고 말하는 연수의 말에 동감하는 ‘나’의 모습에서 확실히 알 수 있듯이, ‘나’는 한때 장 피에르를 동경했던 과거의 자신과 단절했으며, 그때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해졌다. 과거 회상 부분에서 다시 현재로 돌아와, 한때 장 피에르를 연상시키는, 젊은 여성의 성적 매력에 탐닉하는 유부남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것은 그녀가 정신적으로 성숙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프랑스에서 만난 변태 백인 노인은 아무리 늙어도 퇴행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마치 장 피에르의 미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한 인상을 준다. 또한 계속해서 손을 잡고다니자고 하는 이 백인 노인의 요구는 손이 성적인 접촉을 매개하는 신체부위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장 피에르의 손은 성적인 욕망과 관련된 기호로 읽힐 수 있으며, 이 소설 또한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성적 욕망이 관여된 발달에 관한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분명 이 소설은 성숙에 관한 소설이며, 성숙해지는 것에 실패한 ‘남성’과 성숙해져 자신을 돌아보고 남성의 욕망에 예속된 대상이 아니라 한 사람의 주체로서 자리매김 하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소설은 성숙이라는 것이 최종적인 정착지가 있다는 고루한 결론에 반기를 드는 듯하다. ‘나’가 스스로 완전히 성숙했다고 생각한 순간에, ‘나’가 일일이 쌓으며 도출해낸 앎을 마지막에 이르러 한번 더 비튼다. ‘나’가 계도하려 했던 여성이 기다리던 이는 그 유부남 연구자가 아니었던 것. ‘나’가 한참 만에 어렵사리 얻은 그 귀중하고 간절한 지혜조차 이성애 내지는 연애 중심주의적 사고방식에 불과했던 것이다. 구원자 여성 어른을 자처하려던 ‘나’는 묘한 허탈함을 느끼며 젊은 커플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들을 바라본다. 이는 그녀가 자신의 과거를 극복했다는 것으로 읽힐 수 있음과 동시에, 아직 그녀에게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와 ‘연수’를 바라보는 것처럼 미래의 나 또한 현재의 나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