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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이야기] 나의 첫 책방

드넓은 세게로의 첫걸음

by 잠비

작은 책방이었다.

이제 막 학교에 입학한 8살 아이가 보기에도 그리 넓어 보이지 않은 공간. 그 작은 공간에는 천장까지 알뜰하게 빼곡히 책이 꽂혀있었다. 아빠의 손을 잡고 들어간, 작으면서도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세상 속에 던져진 낯선 흥분을 아직 기억한다.


그동안 책이란, 엄마가 사주셨던 전래동화 전집, 세계 명작동화 전집, 사촌 오빠가 물려준 백과사전 시리즈 등이 전부였다. 책을 좋아했던 부모님 덕분에 작은 집 한편에 나의 책들은 늘 넉넉하게 한자리를 잡고 있었다.

글을 알기 전에는 알록달록 그림 만으로도 즐거운 상상을 할 수 있어 좋았고, 읽을 수 있게 된 후에는 이야기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그게 세상에 전부인 줄 알았다.


집에 있는 책들의 책등이 꽂꽂함을 잃어 갈 때 즈음 아빠의 손을 잡고 매미 우는소리를 들으며 산책을 나섰다. 아빠의 손을 잡고 산책을 나설 때면 혹시나 하는 작은 기대감으로 매번 설렜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종종 산책 끝에 문방구에 들러 내가 좋아하는 작은 장난감들을 사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은 집에 오는 길이 조금 달랐다.


‘문방구는 저쪽인데 어디로 가는 거지? 집으로 가는 길도 아닌데..’


“딸랑”

청명한 풍경 소리가 반짝이며 유리문이 열렸다. 하늘만큼 높은, 천장까지 가득 채워진 수많은 책들이 알록달록 예쁜 모자이크처럼 한눈에 들어왔다. 따뜻하고 포근한 냄새와 유리문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의 밝음, 수많은 책등의 글자들이 서로 어우러져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바라본 아빠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감춰지지 않는 8살 아이의 황홀한 표정이 아빠에게 행복을 가져다준 게 틀림없었다.


“천천히 골라봐, 사고 싶은 책이 있으면 사줄게”


처음이었다. 내가 읽을 책을 내가 선택한다는 것이.
어색함에 잠깐을 주저하다 책장 앞에 서서 재미있는 동화책을 읽듯 책등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몇 권은 꺼내어 휘리릭 책장을 넘겨 보기도 하고 책 속 그림을 유심히 살피기도 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슬슬 다리가 아파질 즈음 한 권의 책을 골랐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위인전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글 밥이 적었던 것도 아닌데.. 그림이 좋았던 걸까? 아직도 그 책의 그림 몇 장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데 내가 좋아하던 그림 채도 아니었다. 다시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물어보고 싶다. 무엇이 좋아 그 책이었냐고. 아직도 이유를 모르는 그 책은 책등이 다 벗겨질 때까지 읽히고 또 읽혔다. 아마 그 책을 보고 또 보고 아끼고 사랑했던 이유는, 책을 사러 갔던 그날의 모든 기쁨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몇 년 전 어느 날.

나도 딸아이의 손을 잡고 서점에 갔다.

그날의 아빠처럼.

매미소리 울리는 맑은 날, 청명한 풍경소리 반짝이는 그 문을 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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