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소한 이야기] 여름밤 그 영화

‘알포인트’를 아시나요?

by 잠비

여름밤 짙은 어둠 속 안개비가 내리고 있다. 지하철 입구로 나오는 찰나, 먼지들이 안개비와 뒤엉켜 텁텁한 흙내가 입에 맴돌았다. 끈적하게 공간을 채운 습기와 한 치 앞도 밝히지 못하는 뿌연 가로등 불빛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다가왔다. 비 오는 여름밤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그날은 작은 들숨 한 번에도 얼어붙을 것 같은 공포가 있었다. 모든 감각들의 시간이 멈추려는 찰나 선명한 밝은 빛이 등을 비추었다.


우윳빛 김 서린 창을 긁어내리며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자 반갑게 웃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언제나 반가운 그녀지만 그 순간은 몇 배는 더 반가웠다.


“오래 기다렸어?”


나의 금요 메이트, 그녀다!

DNA에 유쾌함과 경쾌함을 장착한 그녀와 함께라면 속상함은 쉽게 희석되고 즐거움은 농축되어 두고두고 되뇔 수 있어 좋다. 교복을 입던 그 시절부터 월요일이 제일 두려워진 20대까지 늘 한결같다. 그녀의 한결같음이 이번에도 시공을 누르던 공포를 단번에 날려버렸다.


오늘은 어떤 영화를 볼까 하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의 차는 어둠 속 안개비를 뚫고 극장으로 달렸다. 밤에 가까운 저녁시간 김포공항으로 달리는 도로는 금요일의 북적거림이란 찾아볼 수 없이 한산했다. 그 한산함이 영화를 보러 가기 전, 숨 가쁘게 달려온 일주일에 쉼표를 찍어주는 듯했다. 그렇게 한숨 고르고 영화관에 도착했다.


우리가 자주 찾는 영화관은 김포공항 안에 있는데, 금요일 밤에 도착해도 애매 없이 상영 중인 어떤 영화든 골라 볼 수 있어 좋았다. 가끔은 아무런 정보 없이 도착해 극장 안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보고 고르기도 하고, 가장 빨리 시작하는 영화를 골라 보기도 했다. 그날은 가장 빨리 시작하는 영화를 골랐다. 최소한의 정보는 알아야 하니 포스터도 봤던 것 같은데.. ‘눈 뜨고 코 베인다’ 더니 지금 생각해 보면 뭔가 쓰였던 게 아닌가 싶다.


‘이런 영화였어…?’


구조를 요청하는 으스스한 무전기 넘어 목소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붕대를 감고 병상에 누워있는 군인, 육체의 고통보다 공포에 고통스러워 절규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덤덤하게 듣고 있는 부대장. 영화 시작 5분도 안되어서 전개된 내용이다. 무엇 하나 허투루 짜이지 않은 공포의 시작은 그랬다.


공포영화를 좀 봤다는 사람들은 이미 알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초록창에 국내 공포영화를 추천해 달라면 어김없이 순위에 꼽히는 바로 그 영화 “알포인트”다. 처음부터 끝까지 음침하고 공포와 궁금증이 질척 질척 달라붙어 집중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에 20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그 영화를, 공포영화 빼고는 다 괜찮다는 그녀랑 보게 된 것이다.


공포/스릴러 장르를 좋아하는 나는 순간 신이 났지만 이내 그녀가 걱정이 됐다. 스크린을 마주하는 100분이 곤혹함으로 가득 차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맘이 쓰였다. 공포에 움찔거리면서 짜릿하던 순간마다 옆자리 그녀는 스크린을 외면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덕분에 영화를 보는 내내 팝콘 한 알, 콜라 한 모금도 편히 먹지 못했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서로 다른 의미로 우린 의자에서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다.


어느 정도 객석이 비워질 때 즈음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녀가 애써 웃으며 재미있었다는 말을 건넸다. 배려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아닌 걸 알면서도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집으로 오는 길, 아직도 걷히지 않은 안개를 보니 아직 영화가 끝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다. 나도 이런데 그녀는 오죽할까 싶어 이런저런 웃긴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끝나도 끝난 게 아닌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우리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날의 공포를 이야기한다.

날씨부터 뭐에 홀린 듯한 영화 선택까지 지나고 보니 완벽했다고, 제대로 봤다면 그 영화를 보기나 했겠냐며 말이다. 시간은 그날의 공포를 날씨까지 완벽하게 구색을 맞춘 잊지 못할 추억으로 만들어 주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소소한 이야기] 나의 첫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