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한 전조
11시.
창밖은 이미 어두워진 지 오래다. 맛있는 음식과 아이들의 귀여운 재잘거림으로 채워졌던 식탁은 오렌지빛 불빛으로 물들었다. 평온하게 하루를 마감하고 싶은 순간.
“엄마~하하하하하~!!!!”
“쿵! 쿵! 쿵! 쿵!”
윗집 아이의 괴성과 발망치 소리가 적막을 깨고 날아든다. 잠든 아이들이 놀라 깰까 봐 급히 아이방으로 들어갔다. 뒤척이는 아이의 귀를 막고 등을 다독이며 다시 깊은 잠이 들기를 기다린다.
“하지 말랬지!”
“쾅! 쾅!”
윗집 여자의 앙칼진 고함소리와 물건을 내던지는 소리가 뒤를 잇는다. 늘 있는 일이기에 뒤척이던 아이도 몇 번의 다독거림으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나를 이루는 온몸의 세포들은 베일 듯 날을 세우며 깨어났다. 그리고 일제히 한 목소리를 낸다. 오래 참았다고,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몇 년 전.
이사 걱정 없는 우리 집이 생겼다. 꿈만 같았다. 이 집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모든 공간이 행복으로 빈틈없이 채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거라고 믿었다. 아닐 이유가 없었으니까.
“낮에도 소리가 크던데 힘드실지도 모르겠어요.”
“아, 그래요? 윗집에도 아이가 있나 보군요~”
이틀에 걸쳐 입주청소를 해주신 사장님이 청소 후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슬쩍 한 마디를 하셨다. 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말갛게 웃는 날 보는 사장님의 표정에 쓴웃음이 걸려있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중생이 안쓰러워 웃음 끝도 쓰셨나 보다.
이사를 오고 며칠 안되어서부터 사장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었다.
윗집 아이는 낮, 밤을 가리지 않고 뛰었다. 걸어 다니는 순간에도 천장이 울렸다. 놀 때는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르며 뛰었고, 슬플 때는 괴성을 지르며 발을 쿵쿵거렸다. 또 어느 때는 야단치는 엄마의 괴성과 더불어 물건을 집어던지며 소리 지르고 발악을 했다. 그렇게 행복으로 채워질 것이라 믿었던 집은 층간소음으로 구석구석 채워졌다.
어떻게든 멈추게 해야 했다.
아랫집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고 알리고 싶었다. 당신들이 땅이라고 생각하고 힘껏 내리치는 바닥은 아랫집 사람들의 머리 위 천장이라고, 땅처럼 울림과 소리를 흡수하지 못하고 아랫집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직접 찾아가면 이웃 간에 감정이 상할까 싶어 관리소에 도움을 청했다. 늦은 시간인데 윗집이 너무 시끄럽다고.
연락을 하고 난 후 잠시 조용한가 싶더니 다시 시작된 소음과 함께 인터폰 벨소리가 울렸다.
“죄송합니다, 인터폰을 여러 번 했는데 받지를 않네요.”
“네…”
“경비실에서 확인해 봤는데, 아이가 뛰고 노는 소리가 나는데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하더군요. 저희도 난감하네요..”
“네….”
지난한 인내의 날이 지속되었다. 관리소와 경비실에 연락하기도 미안해질 무렵, 윗집 소리에 자던 아이가 놀라 경기를 일으켰다. 처음으로 윗집에 찾아가 벨을 눌렀다. 역시나 아이가 내지르는 괴성과 둔탁한 울림소리들이 현관문 너머로 생생하게 들렸다. 그리고 드디어 문이 열렸다.
“누구세요!!”
“아랫집인데요. 지금 12시가 넘었는데 너무 시끄러워서요.”
“우리 안 뛰었어요!”
“.....”
이런 어이없는 대화가 오가는 짧은 순간에도 빼꼼히 얼굴을 내민 윗집여자의 등 뒤로 남자아이가 저보다 큰 형과 함께 공을 던지며 돌고래 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해맑게 뛰어노는 아이의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누구야?”하고 소리쳤다. 순간 윗집여자가 뒤를 돌아보며 아이에게 “조용히 해!”라고 짧게 내지른 뒤 날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뛰지 않았어요. 애가 물먹으러 냉장고에 잠깐 간 거예요! 애를 묶어두고 물도 먹이지 말라는 거예요!?”
하.. 하하하….
내 눈은 해태고 귀는 장식인가… 얼굴에 그들에 대한 어이없음과 분노가 서렸다.
“방금 소리 지르고 뛰었잖아요. 이 시간에 저러는 게 맞는 건가요?”
“그럼 애를 묶어놔요!? 지금 우리 애가 잘 못했다는 거예요 뭐예요!”
“애는 잘 못이 없죠. 이 시간에 소리 지르고 뛰면 안 된다고 알려주지 않는 어른의 잘 못 아닌가요?”
“애를 안 키워봐서 모르나 본데 애들이 그러는 걸 어쩌란 말이에요!”
“저도 아이를 키우고 있어요. 그리고 어린이는 밤늦게는 소리 지르고 뛰고 노는 게 아니라 자는 거라고 알려줄 겁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일 거라고 예상했으면서도 한 두 마디 말이 오갈수록 기가 찼다. 저런 안하무인격 당당함의 근원은 무엇인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이런 대화를 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기가 차서 대꾸하다 보니 말이 길어졌다.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다시 한번 조용히 해달라고 말하고 내려가야지 싶은 순간 문이 닫혔다.
‘뭐지…‘
마음속 무언가가 툭!.. 끊어졌다.
윗집여자의 무례함에 기가 막혔다. 그동안의 행동을 봐서는 상식선의 대화가 어려울 수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토록 무례할 줄이야. 늦은 밤 불청객은 내가 아니라 그들인데 왜 내가 이런 상황에 놓여야 하는지 싶어 분함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집으로 돌아와 어두운 거실에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당장이라도 이 집을 떠나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이사만 하면 이 고통이 끝날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왜 내가 이사를 가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사는 니들이 가야 하는 거 아냐? 니들이 사라져야 하는 거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사라져야 하는 건 윗집이었다.
상식이 없는 그들이 있는 한, 우리가 아니라도 또 다른 희생자는 계속 발생할 것이다. 미래의 모든 희생자를 위해서라도 저들이 사라지는 게 맞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분노를 증폭해 갔다. 메마른 음식을 잔뜩 삼킨 것처럼 가슴이 메어지고 숨이 막혀왔다. 모든 피가 머리로 치고 올라오고, 귓가에는 위험을 알리는 사이렌 같은 이명이 시작됐다. 저것들이 결국에 나를 죽이는구나 싶은 순간.
“똑. 똑.”
.
.
.
.
.
“똑. 똑.”
얇지만 단단한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크소리 같았던 그 소리는 주변을, 그리고 내 감정까지도 깨끗하게 씻어내려 갔다.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안온한 고요가 순간 모든 공간을 밀도 있게 채워버렸다. 그리고 느껴지는 한 마디.
“그걸로 괜찮겠어…?”
누가 어디에서 하는 말인지도 모를 그 한 마디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채로 가슴에 읽혔다.
그리고 무언가가.. ‘꿈틀’ 거렸다.
‘괜찮지 않을까..? 나만을 위한 게 아니야… 그리고 이건 그들이 자초한 거야..’
생각이 끝나는 순간...
“딱!”
아주 얇고 단단한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되돌릴 수 없는 무언가가 시작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아직 모르지만 가슴속 깊이 후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적막한 새벽 온몸 구석구석 울리는 천장의 울림도 더 이상 나의 분노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 집으로 이사오기 바로 전 날밤, 그 설렘이 다시 찾아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랜만에 아주 편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