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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훈 Jan 22. 2024

강바람에 실려오는 눈발에 대한 기억

예전 초등학교 시절에는 방학 중간중간에 학교에서 긴급 소집하는 날이 있었다. 비상망을 가동한 것인데 지금처럼 전화가 있었던 것 아니고 해서 방학 시작하기 전에 공지했던 것 같다. 그런데 출석부 기재한다고 해놓고 결과적으로 보면 출석일 수에 산입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생사여부를 확인하려고 했던 것인지 모를 일이다. 긴급 소집도 방학 후반에 좀 하면 좋을 텐데 꼭 방학 중반쯤에 시도를 해서 결과적으로 친척집을 방문한다 해도 오래 있을 형편이 되지 못했다. 예전엔 정말 친척집을 방문해 거의 한 달 가까이를 사촌들과 보냈다. 물론 조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 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이런 방문이 지금 보면 사촌 간의 정을 쌓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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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소집 날로 정해진 그날은 너무 덥든지 비가 오든지 눈보라가 쳤다. 오히려 학교에 비상 소집되어 가는 것이 아이들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 긴급 소집으로 방문해야 서로 인사 몇 마디 나누고 점심시간 전에 귀가하는 것이 전부이다. 도시락을 싸 간 것도 아니고 대단한 스케줄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말이다. 이런 제도도 쭈욱 이어지지는 않은 것 같다. 많은 기억이 없어서 이다. 다만 어느 날은 우리 집 옆에 사시는 선생님이 방학 중 학교에 가시면서 무얼 물어볼 때가 있는데 그건 아마도 학교에 다녀온 내게 학교 상황을 파악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그 선생님도 아마 비상소집으로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름방학은 그나마 괜찮은데 겨울방학 때는 눈이 내리는 날이 많았다. 거기에 어떤 날은 안개까지 가득해 사방을 분간할 없기도 했다.

한편 내 기억으로는 단편적으로나마 그 선생님이 담임으로 있을 때만 유독 기억이 난다. 나에게 좋지 않은 추억을 주었던 과학 주임 선생 말이다. 그전에도 기록을 한 적이 있는데 오늘 또 그분을 기록에 남기는 꼴이다.     

텅 빈 교내는 찬 기운만 가득했다. 얼마나 교내에 머무르겠다고 조개탄을 피웠겠는가! 평소에도 영하로 얼마 이상 내려가야 조개탄을 지급했는데 말이다. 아이들에 비해 선생님들이 근무하는 교무실은 따뜻했다. 소사로 일하시는 아저씨가 아침부터 난로를 지펴 놓았기 때문이다.  요즘도 교실을 그렇게 짓는지는 몰라도 예전의 교실은 교실 바닥으로 바람길이 나 있었다. 물론 그 구멍은 아이들이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 길은 바람이 넘나들며 환기를 유도한 것 같다. 그 길은 겨울에 찬바람을 통과시켜 교실 안의 온도를 크게 떨어뜨리기도 했는데 바닥틈새 사이로 들어는 바람이 아이들의 발을 꽁꽁 얼렸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목조 건물은 그런 현상이 더욱 심각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면 교정에도 일본산 소나무가 많이 심어졌다는 기억도 있다. 우리 때는 하필 앨범을 만들지 않고 단체사진을 한 장씩 찍어 많은 기억들을 잊게 했는데 왜 우리 때만 그랬는지 알 길이 없다. 아마 그때는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과 맥을 같이 하는 때이다. 79년 12월 말이다. 정국이 불안정한데 어쩌면 그렇게 알아서들 입맛에 맞는 정책을 선택했는지 아쉽기만 하다. 우리 시골에서는 그때 어른들이야 그 상황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이들은 사태를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서울에 다녀온 어른들도 없고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눈이 오는 날 우산을 갖고 나간다는 것은 사치였다. 우산은 여름용품이어서 어디 두었는지 겨울에는 찾기 힘들기도 했다. 찾았다 해도 먼지 쌓여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동네 대부분의 집들이 초가였는데 초가지붕에 고드름이 한가득이다. 초가가 아닌 함석지붕이나 기와지붕은 별도의 빗물받이를 하기 때문에 고드름이 생겨도 몇몇에 국한되었는데 초가지붕은 크기만 다를 뿐 지붕전체가 고드름으로 빙 둘러쳐져 있다. 동장군이 집을 보호하듯 말이다. 물론 지금에서 보면 사고 위험이 매우 높은 것들이다. 당시에는 아이들이 하나씩 하나씩 떼어 놀이를 하는 데 사용했으므로 많은 고드름은 어찌 보면 부자느낌이 드는 그런 것이었다.

거대한 고드름으로 칼싸움도 하고 칼이 부러지면 멀리 논밭을 향해 던져 보기도 하고 비슷한 느낌의 부메랑을 만들어 보기도 한다. 그때 한참 마린보이라는 만화영화가 유행을 했고 주인공이 던지는 부메랑을 합판을 오려서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때의 고드름은 부자느낌을 갖게 했다. 고드름을 가지고 노는 것도 재미있었는데 실제로 돈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아이들에게는 정말 큰 즐거움을 줬다. 아마 지금의 어른들이 로또를 사고 일주일간 좋아하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집 밖으로 멀리 나가 위험한 개천에서 얼음을 지치는 것보다 부모님들에게는 더 안전한 놀이처럼 보일지 몰랐다. 지금과 같이 고층에서 고드름이 떨어져 사고를 일으키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 놀이 후에 부잣집은 아이들에게 들깨나 콩으로 만든 강정을 주기도 하고 엿을 고아 주기도 했다. 그 한 켠으로 엿을 만들고 난 후 생기는 달착지근한 엿밥을 얻어먹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맛을 느끼지 못할 것 같다.

암튼 그때 고드름놀이 만으로도 지금의 어른들이 매주 복권방에 가서 복권 한 장을 사며 느끼는 행복한 상상보다 더 즐겁지 않았을까 싶다.     

대문 옆에는 썰매나 팽이, 털신이 없었던 아이들은 여름철 우기에 사용했던 긴 장화 등 겨울에 적합한 것들만 놓여 있었다.

강이 없는 시골에 농사용 논물을 빼내기 위한 상수로와 하수로가 있는데 그중 하수로는 가뭄 때를 제외하고는 연중 물이 차 있어 이곳이 꽁꽁 얼면 미끄럼 타기 놀이를 하거나 팽이를 치고 썰매 등을 탔다. 이런 즐거움운 본격적으로 낮 기온이 올라는 오전 10 인근까지만 가능한데 오전 10시를 넘어서면 얼음의 강도가 약해져 물에 빠지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오늘처럼 추웠는데...

차를 주차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근하다가 출근 중간 역에 내려 돌다리를 건너려니 매서운 강바람이 눈과 함께 밀려온다. 내 몸에 걸친 것들은 보통 상온 5~6℃정도에 맞춰져 있기에 이런 추위를 감당하기 쉽지 않다. 얼마 만에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지 모르는 그 바람과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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