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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훈 Feb 21. 2024

정월 대보름


st. stephen 2019.2.18

 

 

설이 지난 지 15일이 되어 간다.

예전 어린 시절 넉넉하지 않은 가정의 경우에는 설을 보내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겨울철 농한기에는 당연히 일거리가 없고 가을에 수확한 먹거리도 바닥을 보여가는 시점이다.

특별한 것이 있다면 가끔 외지에서 들어오는 방물장수나 곶감 장수 새우젓 장수 생선장수에게 보리쌀이나 콩 등을 주고 특별한 반찬을 마련하거나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 그나마 이벤트라고 할 수 있다.

돌아서면 배가 고프다는 아이들 속에서 아버지들은 무슨 돈으로 술을 마시는지 거의 매일이다시피 거나하게 취해 달빛을 등지고 집에 돌아왔다.

지난해 봄부터 키워오던 돼지도 설이 오기 전에 팔아 버렸고, 그때 나온 비용으로 설을 보냈으니 이제 보릿고개를 넘기까지 한참의 시간을 특별날 것 없는 “못 벌고 못 쓰는”경제활동으로 버텨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러한 시기에 정월대보름이라는 것을 두어 배고픈 아이들에게 쥐불놀이를 하게 한다는 것은 아이들의 성장에너지를 필요 이상으로 고갈시키는 것이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쥐불놀이는 보통 들판의 잡풀 속에 있는 해충 알을 태워 없애 버리는 효과가 크다. 동네 어른들의 단합을 유도해 진행할 수도 있지만 술과 특별한 먹거리가 제공되지 않는 한 어른들의 참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모두가 그렇게 여유롭지 않은 가정형편이고 보니 선뜻 일 같지도 않은 일에 비용을 대는 것도 쉽지 않았었을 듯싶다. 적어도 어른들에게 쥐불놀이란 어른들이 기나 긴 겨울을 보내는 방법 중 하나로 밤마다 벌였던 술추렴을 비롯하여 닭을 잡거나 냇가의 얼음을 깨고 민물고기 매운탕을 만드는 것보다는 유흥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한층 관심을 끌 수 있는 요소를 가져야 했다. 단순히 찬밥과 나물류 정도로 호기심을 유발하는 정도로는 큰 관심을 받지 못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낮에는 얼음을 지치고 썰매를 타고 그러고 나서도 지치 지를 않는지 밤이 되면 몇 날며칠을 들판을 뛰어다니며 불놀이를 한다.

문제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저녁 먹은 다음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벌이는 일이기에 에너지가 쉽게 고갈되는 것이 문제였다.

아이들이 많은 집의 경우 할머니들은 아이들이 집에서 뛰어다니는 것을 크게 제지하였다. 배가 쉽게 꺼지는 것 즉 돌아서면 배고프다는 성장기의 아이들에게 포만감을 조금이라도 오래 유지되도록 하려는 고육책이다.  할머니들이 아이들을 위해 마련한 간식거리 종류를 보면 쌀 부스러기인 싸라기로 엿을 만들거나 늙은 호박을 밀가루와 콩을 넣고 호박죽을 한솥 끓여 놓기도 한다.


이런 마당에 쥐불놀이라니. 그것은 아마도 농토께나 가지고 있는 소작농을 면한 집 등을 중심으로 풍년을 기약하며 벌인 일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것이지 않나 싶다.

 

어차피 설이 지나고 나면 배곯는 집이 몇 가구 정도는 생겨났고 이에 따라 인심 사납다는 이야기가 나지 않도록 쌀을 꾸어 주거나 해야 할 판이었다. 동네 민심을 적당히 제어하려면 집집마다 제기되고 있는 불만을 어느 정도는 해소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이 참에 정월대보름 명절에 하는 것들을 살펴보면 오히려 설보다 가지 수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것에 부럼 깨뜨리기가 있고, 아침녁에 귀밝이 술 마시기가 것이 있다. 또 가으내 마련해 두었던 건조된 나물류를 모두 꺼내  대보름 전날부터 삶아 무치기도 하고 오곡이 들어간 찹쌀밥을 지어놓고 정월대보름 당일에는 찬밥 그대로 먹었다.

그러나 이런 음식준비는 대부분은 어느 정도 행사께나 하는 살림규모가 있는 집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없는 집에서는 부럼을 명절이 지난 시기까지 남겨 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곡이라는 것이 가당치도 않다. 봄에 파종할 씨앗정도를 남겨두었다면 모를까.

 

그런고로 배가 고픈 이웃 아이들을 위해 집집마다 부엌 찬장에 찬밥과 나물들을 많이 남겨 놓아 몰래 들어와 가져다 먹을 수 있게 하였다. 불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철칙이 있으므로 아이들에 의한 화재 염려도 없었다.

 

정월 대보름은 어찌 보면 모두에게 윈윈 하는 아이템이었는지 모른다.

아침에 압력솥에서 삶아지고 있는 말린 나물류 들을 보면서 우리 조상들이 서로에게 생색내지 않으면서도 불만을 해소시켜 나갈 줄 아는 지혜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관습이나 전통 같은 것이 그런 것이지 필요에 의해 생성되고 또한 소멸되고 말이다.

 

그저 아무렇지 않게 지내왔던 정월대보름이었는데 오늘은 좀 특별나게 접근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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