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훈 Jul 30. 2024

시시포스의 삶은 무엇이 다른가

까뮈의 시시포스의 신화를 읽으면서 삶은 의미 없는 결과물의 반복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갖는다.

꽃이 피고 지고 나뭇잎이 새로 나고 떨어지는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식생으로 라면 비슷할지도 모르겠으나 삶의 과정이 지난하게 길기 때문에 단순히 자연의 반복과 비교하는 것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 한편에선 인생에 말년에는 왜 부침이 적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스스로 정한 답은 아마도 적은 활동 내려놓는 마음자세로 인해 욕망이 크지 않아서라고 생각해 본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성찰을 이어간다. 그 성찰이 나를 붙잡고 나의 삶을 붙잡아준다. 성찰은 의미를 부여하고 삶을 이어가게 한다. 어쩌면 새롭게 태어나는 꽃이나 나뭇잎처럼 성찰에 의해 내가 새롭게 되기에 말이다. 꽃들이나 나뭇잎들 새로 태어나지 않고 영속된다면 비바람과 햇볕과 해충 등에 의해 호된 삶의 아픔도 영속적으로 겪어야 했을 것이다.

Albert Camus

삶의 고통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였다면 그나마 위안이 될 수 있겠다. 시시포스의 전설처럼 커다란 바위 덩이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고 다시 떨어진 바위 덩이를 다시 밀어 올리는 행위는 그가 신들을 속여 가며 자기 수명을 온전히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바위덩이의 떨어짐의 반복과 밀어올림의 반복은 인간 삶에 매일 무수히 반복되는 일들과 비교한다. 삶이란 그러한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는 산정상으로 밀어 올리면서 겪는 각각의 사건에서 성취감과 자기만족을 가져야 고통을 참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주어진 것과 선택한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고통을 온통 책임져야 하는 사람에게, 즐기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즐기면서 하는 사람은 누구도 이길 수는 없다고 위로한다 하더라도 고통을 즐기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고통이 단련되어 있다 하더라도 고통은 괴로운 것이다.


     

오늘도 부조리한 민원을 앞세우는 사람들을 만나겠구나.

오늘도 또 그 학생의 부모님에게 시달림을 받겠구나.

아마 이런 날들의 반복이라면 정말 쉬는 날이 쉬는 게 아닐 것이다.

생각해 보라!

가슴이 조여 오는 그런 날들이 매일 반복된다면 당사자는 피폐하고 삶의 동력을 상실하고 만다. 내일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 불 보듯 뻔히 보이는 데, 해답도 없는 내가 사라져야만 끝나는 병적인 말들의 잔치에 누구 견뎌 낼 수 있는가 말이다.

병적인 그들의 변명도 나날이 발전해 가는데 당사자의 대처능력은 몇 가지 범주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주변인은 수수방관이다.

시시포스야 말로 본인이 신을 속여서 발생한 일이라지만 우리 인간들이야 그런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고통 혹은 고통의 부산물들을 직접 견뎌내며 보내고 있다. 고통의 강도야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공통적으로 같은 공간에서 많은 날들을 마주 보는 사람으로부터 주어지는 고통은 끔찍하다. 바람직하지 않은 부모로부터 학대 그리고 학교 때는 불량기 넘치는 동급생이나 선후배로부터의 치욕적인 요구가 그렇고 대학을 나와서도 직장에서 만난 많은 이들과 부딪혀야 한다.

정말 매일매일 벌어지는 같은 고통이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군대에서 벌어지는 자살 사건과 학교 선생님들의 자살 사건을 자주 접하는 것도 삶이란 고통이 주는 힘듦이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 지를 보여 주는 일들이다.     

지나고 나면 별일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매일 반복되는 동일한 내용의 고통 역시 견뎌내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폭풍이 몰아치고 잠시 폭풍이 지나간 자리를 돌아본다고 다음에 올 폭풍에 대해 감내할 힘을 가지게 될까?



작가의 이전글 어머니가 치매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