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보면 만주 인근 사람들이 식탁테이블에 꽃 장식을 하거나 항아리에 연꽃을 키우는 모습들이 묘사된다.
꽃을 즐기려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다면서도 사람 사는 것이 물질적인 진보는 이뤘지만 정신적으로는 예전의 모습이 떠 좋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공자 맹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철학자들도 예전에는 그렇게 많은 듯했는 데는 최근 백 년 내에서는 정신적으로 훌륭한 분을 찾기가 쉽지 않다.
각설하고 추석 즈음이면
방마다 방문을 떼어내고 창호지를 새로 바른다. 여닫이 미닫이가 세트로 되어 있는 문은 방마다 두 세트씩이 되고 부엌으로 난문과 창문 두쪽을 합하면 방 하나당 최대 7-8개의 창호지를 발라야 하는 문이 생긴다.
집이 작은 집들은 방마다 창문하나에 방문하나 이렇게 2조로 되어 있다. 방이 두 개면 적어도 4개의 방문을 떼어내고 누렇게 바랜 창호지를 물을 발라 떼어내고 말리고 한다. 그런 다음 풀을 쑤어 새 창호지를 바르면 정말 마음이 날아갈 듯 환해진다.
물론 창호지를 새로 바른다와 꽃이 무슨 연관이야 라고 의문을 달고 싶겠지만 예전에 창호지를 발랐던 경험이 계신 분들은 문꼬리문고리 주면에 국화나 코스모스 꽃잎을 넣어 바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문고리 주변이 잦은 접촉으로 구멍이 잘 나는 편이어서 이 부분에는 창호지를 한 장 더 덧대는 것이 통상의 창호지 바르는 방법이다. 창호지 한 장을 덧대기 전에 꽃잎을 넣어서 바르면 미관상으로 나름 최선의 방법이 되는데 이런 일은 주로 나와 아버지가 했다. 엄한 아버지에게서 미적 감수성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도 기쁜 일이었다.
마당에 펼쳐진 멍석 위에 고추가 말려지고 있고 해가 질 녘이면 더위에 숨어 있던 잠자리가 날아다니고 어머님은 켜질을 우리는 세숫대야에 물을 떠다 색이 누렇게 바래고 구멍이난 헌 창호지를 물에 불려 떼어 냈다. 추석 며칠 전이면 그것은 연례행사처럼 이뤄졌었다. 삶이란 어느 것이 더 행복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버지니까 가족이니까 그렇게 함께 어울려 정이라는 감정을 나누는 것은 마음에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지나고 생각해 보면 그것은 묘한 슬픔 같은 것으로 가슴을 저미게도 한다. 기분 좋은 일이고 평화로운 일일 텐데 왜 가슴은 슬픔으로 차오르는 걸까? 아버지의 심성도 괜찮으신 편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