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가 지은 “나태주의 행복수업” 페이지에 보면 초등학교 때 지수는 육상 선수였다. 수업이 끝나면 주전자로 마른 목을 축이며 텅 빈 운동장을 달리고 또 달렸다.... 성장판이 열려 무섭게 자라는 날쌘 친구들을 앞지를 수는 없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 글을 보면 나는 왜 운동회 날 뛰지 못한다고 선생님에게 이야기하고 뛰지 못했을 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웃에 사는 선생님이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몸이 안 좋으니 뛰지 못하겠다고 말씀드려라 했는데 나는 기실 선생님에게 그 이야기를 전달할 용기조차 없었다. 괜히 쑥스러웠고 본부석에 앉아 있는 선생님을 찾아 뵐 또 많이 이들 앞에서 나의 상태를 이야기할 용기가 정말 없었다. 그냥 뛰고 말지 말이다. 뛰는 모습이 가상했을까 아님 얼마나 우스운 꼴이었을까! 어디선가 보았을 그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린시절에는 친구들과 싸우다 맞아도 쫓아가 때리지 못해 울분을 삼킨 적도 있다. 주력이 그 아이들보다 앞서지 못하니 말이다. 중학교 때는 그나마 우연찮게 공도 차고 힘도 넘치고 체력이 모자란 아이들을 앞선 때도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을 위한 연합시험을 앞두고 체육선생님이 찾아와 기본 점수를 받을 거냐 아니면 체력장 시험을 볼 것이냐를 물었다. 그때는 아무 망설임 없이 체력장시험을 보겠다고 했다.
선생님께 이야기하고 달리기에서는 기본 점수를 받으라고 한 사건은 대입학력고사 시험을 앞두고 체력장 테스트가 있을 때도 생겼다. 마음속으로 정말 1백 미터 달리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역시 선생님에게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냥 절름거리는 그 상태로 달리기를 뛰었다. 사춘기여서 인지 그 느낌이 더욱 생생하다.
나의 많은 일들에 있어서 극단이 있을 수 있겠다. 한편으론 당당하고 한편으론 정말 소심하다. 자기희생이 있는 반면 극단적으로 상대를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어른들이 편하지 않은 것은 어른들과 편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자라지 못해였을 수 있다. 인내하고 공손하게 자기의 마음을 감추어 말하는 것이 어린시절의 나여서 인지 어른이 한 참되었어야 지금도 어른답지 않다. 아직 극복할 것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