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이 되면 방에서 아빠와 함께 아침식사와 커피를 마시며 그날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논의했다. 다행히 아빠와 나는 코로나 확진이 되었지만 증상이 심하지 않았고, 스위스패스 기간은 넉넉했다. 스위스패스 만료 후에는 취리히 패스 48시간을 이용해서 취리히 곳곳을 쏘다녔다(확진이 판명된 후 우리는 마스크를 상시 착용해 다녔고, 숙소에 들어와서 식사를 해결하며 개인 방역에 신경썼다). 한국 사람 중에서 취리히에 있는 다육식물 박물관과 finance 박물관, FIFA Museum, watch museum 등- 취리히 패스를 알차게 사용했다. 스위스에서 하이킹을 더 했으면 좋았겠지만, 내가 매일 밤을 새웠기에 무리였다. 떠나기 전 날까지 아빠와 나는 취리히 골목 끝까지 다녔고, 독일로 가는 기차표를 끊으며 한국행을 실감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비행기를 타기 직전, 우리는 공항 라운지에서 가볍게 맥주 한 잔을 마셨다. 체류기간 동안 마셨던 맥주 중 가장 맛있던 맥주였다. 그리고, ‘그래도 재밌는 여행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한 서로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시간이 될 수 있었다.
아빠는 전형적인 베이비부머 세대의 표상으로,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으시지만 가족을 돌보기 위해 열심히 일하신 분이었다. 딸 둘의 아빠이자, 엄마의 남편으로서 주 6일 근무제로 일하셨던 80년대 열심히 일한 가장으로 말할 수 있겠다. 내가 기억하는 80-90년대는 주 6일 근무제였고, 아빠는 토요일까지 저녁 늦게 근무하시다 들어오시곤 했다. 어린 시절 아빠는 잠만 잔다고 불만을 가졌지만, 크고 나서 보니 아빠는 주말에 주무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물론 잠만 주무신 게 아니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우리 두 자매를 데리고 어디든지 가셨다. 스위스 여행에서 돌아오고 몇 달 후, 우연히 어렸을 때 사진첩을 보게 되었다. 어린이 대공원, 식물원, 경주 등 다양한 곳으로 나들이나 여행을 갔었고, 아빠는 후지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두 자매의 어린 시절 기억을 보존해 주었다. 직장을 다니고 보니 아빠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일하셨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난 그때 아빠보다 더 좋은 조건(주 5일 근무제, 15일 연차 및 기타 복지)을 누리고 있는데, 항상 힘들다 피곤하다를 입에 달고 사는데 말이다.
스위스에서 같이 지내면서 겪은 아빠는 내 기억 속의 아빠보다 더 작아져 있었고, 더 힘들어하셨고, 그리고 예전의 그 듬직하던 아빠가 아니었다. 신체적으로 노화가 나타날 뿐만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힘들어하시는 느낌을 받았다. 뜻하지 않게 10일간의 체류는 엄마와 생이별이라고 생각하셨던 걸까, 배우자만이 줄 수 있는 안정감의 상실이 컸던 것일까? 코로나 확진의 영향 일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아빠는 엄마 없이 지내는 것을 더 울적해하셨다.
Basel 미술관에 가서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서, 아빠는 너네 엄마랑 여기에 왔어야 했는데라고 엄마를 찾았고, 루체른의 Rigi 산에 산악 기차로 올라가고, 케이블 카를 이용해서 내려갈 때 “이런 쉬운 코스라면 엄마랑 왔어야 했는데” 라며 아빠는 엄마를 그리워하셨다. 엉덩이가 통통한 벌이 꽃에 앉은 풍경이나, 소들이 목에 걸린 종을 짤랑 거리는 목가적인 분위기나, 벤치에 앉아 빵을 먹고 있으면 새들이 와서 주억거리는 모습을 보는 그 순간조차 엄마만 생각하신 듯하다. 장크트 갈렌의 도서관에서도 “너네 엄마가 도서관을 참 좋아하는데” 라며 옆에 있는 딸 보다 살뜰하게 엄마를 생각하시는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스위스 여행 초반, 분명히 두 분 의견이 충돌할 때가 있었는데 막상 이 역병으로 인해 의도치 않게 헤어지시게 되니, 견우와 직녀가 되신 모양으로 서로를 그리워하시는 당신들의 사이는 알다 가도 모를 일이긴 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아빠에게 삼식(三食: 아침 점심 저녁을 다 드시는 남편을 이르는 말)이가 되지 말라며 놀렸었고, 엄마는 아빠한테 밥 차리기 귀찮으니 친구와 나가서 드시고 오라는 말을 자주 하시곤 했었다. 하지만 막상 3-4시간마다 한 번씩, 아빠 식사 유무를 챙기는 엄마의 문자를 보며 그래도 “부부는 다르구나”라고 생각했다. 물론 엄마는 문자나 전화로 아빠가 무리하지 않게 하라며 잔소리를 안 하신 건 아니지만…
이 글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뜻하지 않았던 부녀와의 여행을 좀 더 선명하게 기억하고 싶어 쓰게 되었다. 아빠는 최근 치매 검사를 받으셨고, MRI촬영 결과를 아직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아직 아빠의 노화를 의학적으로 받아들일 준비는 전혀 안되었는데, 갑작스러운 검사 소식은 많이 놀라웠다. 아직 나는 철이 덜 들었고, 아빠는 항상 아빠로 거기 그 자리에 계셔야 하는 분인데 아직 믿기지 않는다. 아빠에게 전화했을 때, “나이 들면 당연한 순리 인걸”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아직 그 순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같다. 나는 아빠에게 “오늘 점심 뭐 먹었는지 생각 잘 안 난다”며 가볍게 농담으로 받아쳤지만, 그냥 가벼운 건망증이길 희망한다. 진지한 순간에도 농담을 던진다며 아빠로부터 한 소리 들었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게 농으로 받아친 것 같다. 언젠가 나도 기억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거나, 흘려보낼 것이다. 대부분 잊어버릴 것이다, 용량의 한계가 있으니.
며칠 전 친구 어머니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장례식에 가면 잘 울지 않았는데, 친구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터졌다. 친구도 그런 나를 보자마자 울기 시작했다. 위로의 말을 전하고, 친척들이 오시기 시작해서 장례식장에선 빨리 나왔다. 그리고 집에 오는 길에 아빠한테 전화를 했다. 별 이유 없는 안부 전화였지만, 왠지 아빠한테 전화해야 할 것 같았다. 삶과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몇 번의 봄이 남았을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나랑 제일 가까운 아빠를 놓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되돌아보았다. 소중한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그리고 이런 기억을 추억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반문해 보았다. 일이 바쁘고, 삶이 번잡하다고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등한시하지 않았던가. 아빠가 나와 언니에게 어린 시절의 많은 추억을 만들어 주셨기에, 추억을 기반으로 20대 이후의 삶을 이끌어간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스위스에서 10일간 추가 체류 기간에는 아빠가 어렸을 때 추억을 만들어 주신 것처럼, 내가 아빠에게 추억을 선사할 수 있었다. 아빠는 아직도 친구들에게 이 여행기를 무용담으로 자랑하곤 하신다. 체류 기간 동안 당신은 힘들었지만, 막상 지나고 나니 추억이 되신 모양이다. 또한 추가 여행 기획도 내심 기대하시는 모양이다. 추억이 빛을 바래기 전, 아빠의 검사 결과는 “You are negative”로 나오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아빠와 같이 또 다른 부녀와의 시간을 보낼 수 있길 바란다.
* 덧: 아빠의 검사 결과는 문제없는 것으로 나왔다. 하지만 엄마의 알코올 금지령은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