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찬을 통째 꺼내놓고
금방 돌린 햇반의 뚜껑을 성의 없이 뜯어 밥을 먹으면 아빠는 말했다
오랜 시간 혼자 산 나에게 설거지는 귀찮은 일 중에 하나였고
밥을 지어먹기보다 ‘때우기’에 급급한 나에게
‘설거지거리는 최대한 만들지 않는다’는 오래된 생활방식이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가끔 반찬 통을 열 때 아빠 목소리가 말라붙은 밥풀처럼 달라붙곤 한다.
'쳇, 나도 결혼하면 예쁜 그릇에 예쁘게 차려 먹을 거거든!'
하지만 그 다짐은 이뤄지지 않았다.
나는 ‘나중’이라는 것이 늘 있는, 미래의 어떤 날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지금이 아니어도, 언제고 오고야 마는 날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날.
하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오늘이 그리고 다음 오늘이 또 다다음 오늘이 쌓여서 나중이 된다는 단순한 계산조차 못했던 걸까.
10년 넘게 만나던 남자친구는 한 해 한 해 지날 때마다
‘나중에 결혼하면’이라는 전제를 밑밥처럼 깔아댔지만 그가 말한 나중은 오지 않았고,
예쁜 소품, 예쁜 그릇, 성능 좋은 가전기기를 볼 때마다
‘나중에 결혼하면 그때 사지.. 혼자 있는데 지금 사면 나중에 또 헌거 되잖아...' 라며 손을 떼었던 것들은
내 인생과는 하등 상관없단 듯 멀어져 갔다.
계속해서 행복을 유예하다 보니 나는 지금도 나중도 결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큼지막한 반찬통을 조그만 탁자 위에 올려 놓고 매일의 허기를 때우기에 바빴다.
그래서 오늘 평소라면 안 샀을 접시를 산다.
하얀 바탕에 파란색 원을 동그랗게 두 번 두른,
언젠가 갔던 보라카이 하늘빛과 바다가 생각나는 디자인.
그곳에 곱게 내려앉을 반찬들을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