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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Jan 31. 2021

남겨진 마음들


글을 쓴다는 것은 피하지 않고 들여다보겠다는 다짐과도 같다. 이젠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느꼈다면, 써야 한다. 오늘은 지난 몇 주 동안 미뤄두었던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그는 내 친한 후배이자 오빠다. 2년 전쯤 나에게 한차례 고백을 한 적이 있고, 남자 친구가 있던 나는 그 마음을 거절했었다. 그를 아끼고 좋아하지만 사랑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리고 최근, 일을 그만두고 오래 한 연애도 끝나면서, 다시 그와 가까워졌다. 제주도에서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던 기억이 난다. 근 1년 만의 통화였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놀려댔는데, 우리가 왜 서먹해졌는지 생각 안 날 정도로 가볍고 즐거운 통화였다. 그는 확실히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뭍으로 돌아와 그를 만났다. 고양이를 키우는 그의 집에 놀러 가기도 하고, 같이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그의 장점이자 단점은 어느새 스며든다는 것이다. 음악을 공유하고, 영화나 책을 추천해주고,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수다를 떨면서 서로의 일상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기 시작했다. 아직도 진행형이지만, 몇 개월 전의 나는 나 자신을 자책하며 비관하는 일에 쓸데없이 능했고, 그는 그런 나를 다독이는데 지나치게 다정했다. 





그때 나는 알아챘어야 했다. 





그가 자꾸만 우리 집으로 택배를 보내왔다. 처음엔 소소한 것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젤리 같은 것. 이유 없이 받는 걸 마음의 짐같이 여기는지라, 몇 번이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근데 왜 나한테 이런 거 선물해줘?” “나한테 왜 잘해줌?” 그럼 그는 대답했다. “이게 뭐 별거라고, 후배가 이런 것쯤은 줄 수 있지 않아?” 그러면 나는 만나서 뭐라도 사거나, 편의점 모바일 쿠폰 같은 걸 보내 주거나.. 하는 방향으로 마음의 짐을 덜어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느 순간 나는 일방적으로 받고 있었다. 매일 그가 보낸 마음이 방안에 가득했다.  잠은 잘 잤는지, 오늘은 뭐할 건지... 따위를 묻다가 내가 답이 없으면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옆에 여직원이 어떤 웃긴 실수를 했는지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보내왔다. 자신의 일상에 내가 늘 접속 중이길 바랐던 것이다.




언젠가부터 보내오는 선물들이 부담스러웠다. 내 기준엔 호의로 받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나는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그를 오해하게 만든 게 분명했다. 나는 그의 여자 친구가 아니다. 이런 거 보내는데 돈 쓰지 말라고, 보내지 말아 달라고, 조금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가 보내온 마지막 택배에는, 살면서 내가 처음 받아보는 아주 긴 편지가 들어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그 역시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많이 울었다.




편지를 읽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살면서 이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던가 -였다. 지난 몇 달간 나보다 나를 더 많이 바라본 사람은 그였나 보다. 놀라울 정도로 절절한 사랑고백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나는 왜 사람 헷갈리게 해서 그를 이 지경까지 오게 만들었는가. 그에겐 이 편지가 나랑 잘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이자 염원이었을 것이다. 편지 말미에 적힌 ‘사랑하는 법을 알게 해 준’ 내가 역겨웠다. 나는 그가 이토록 원할만한 사람이 못된다. 




괴로웠다. 미치도록 괴로웠다. 수많은 장면들을 되감기 해보니 그제야 보였다. 모든 게 징후였고 증상이었다. 나는 왜 나만 생각했을까. 우린 여기서 멀어져야 한다. 만나지 않아야 한다. 그를 더 이상 혼란하게 하면 안 된다. 하지만 성의 있게 거절하고 싶었다. 거절이면 거절이지 어떻게 거절하는 게 뭐가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응 잘 받았어, 오빠가 기다릴 것 같아서 받았다는 얘기 정도는 바로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미리 먼저 문자 못하겠더라. 마음이 무거워서 내가 감당이 잘 안됐어. 이 복잡함이 정리가 되면 내가 먼저 연락할게”




그가 편지를 잘 받았냐고 물어왔을 때 내가 마지막으로 답한 문자다. 복잡함이 정리가 되면 먼저 연락한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연락을 못했다. 




내가 그에게 편지를 받은 날은 1월 15일. 헤어진 전 남자 친구의 생일이었다. 누군가에겐 일생일대의 용기 일 수 있는 사랑 고백을 앞에 두고도, 헤어진 남자 친구의 생일이 더 마음에 걸렸다. 남겨진 사랑은 이토록 가혹하다. 



친구를 만나 소주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책장 밑에 하얀 쇼핑백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여름 남자 친구가 준 생일 선물이었다. 쳐다만 봐도 목울대가 저릿해서 리본조차 풀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둔 구두. 숨 한 번에 큰 결심을 하고 상자를 열었다. 못생기고 투박한 발을 들이밀자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졌다. 얇고 단단한 굽 위에 올라서서,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함부로 사랑을 받지 말자. 함부로 사랑을 말하지 말자. 내가 할 수 있는 결심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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