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녀탕에는 더이상 선녀가 나타나지 않는다

초여름에 대한 나의 첫 번째 기억은 화악산에서 보낸 여름이다. 나는 기억날 때부터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매년 아빠를 따라 화악산에 있는 수연언니의 아빠네 집을 방문했다. 우리 아빠와 수연언니네 아빠는 대학동기였다. 우리 가족이 그곳에 갈 때쯤 수연언니도 엄마와 함께 아빠가 있는 화악산 집으로 갔다. 우린 항상 그곳에서 만나 어울렸다. 나와 내 동생은 수연언니와 함께, 아빠와 엄마는 수연 언니네 엄마, 아빠와 함께. 도시와 달리, 초가집에서는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어서 좋았다. 신나고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화악산에는 선녀탕이라는 계곡이 있다. 엄마는 그곳이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의 배경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그곳에서 수연언니와 내 동생, 나, 엄마, 그리고 수연 언니네 엄마까지 다섯 명이서 수영하며 놀았다. ‘선녀와 나무꾼’에 나온 선녀들처럼 옷가지는 햇볕이 드는 바위에 올려놓은 채. 계곡물은 차가웠지만 물에 들어갔다 나오면 몸이 반질반질 깨끗해진 기분이었다. 마치 내가 선녀라도 된 듯했다. 그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빨리 선녀탕에 가고 싶었다.

선녀탕에 갔다가 화악산 집으로 돌아오면 옥수수와 감자를 쪄 먹었다. 나와 동생은 감자에 설탕을 한 움큼 뿌려 먹었고, 수연언니는 소금을 솔솔 쳐 먹었다. 그걸 본 어른들은 “수연이는 벌써 어른 입맛이네”라고 했다. 왜 소금을 쳐 먹으면 어른인 건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나도 두 살 더 먹으면 수연언니처럼 감자에 소금 찍어 먹는 게 더 맛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우리는 감자를 다 먹고 나면 옥수수를 먹었다. 수연언니는 옥수수를 한 알 한 알 떼어내 먹었다. 보라색이 섞인 노란 옥수수 알은 수연언니의 새로운 앞니가 되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날에는 수연 언니네 아빠가 트럭을 몰고 화악산 아래까지 데려다주었다. 수연언니와 나, 내 동생은 버스 정류장 맞은편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우리는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며 거북알을 사 먹었다. 가끔은 뽕따나 빠삐코를 먹기도 했다. 어른들은 수연 언니네 아빠에게 몸조심하라는 말을 했고, 아빠는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말하면 수연언니네 아빠는 말없이 허허 웃었다. 수연언니는 버스 창가에 앉아 아빠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약간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마도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은 더이상 화악산 집에 올라가지 않았다. 수연 언니네 아빠는 화악산 집에서 내려왔고, 우리 아빠처럼 양복을 입고 아저씨네 회사로 출근했다. 우리는 수연 언니네와 만날 때면 소고기를 먹으러 갔다. 수연 언니네 엄마는 화장을 하고 오기도 했고 엄마가 갖고 싶다던 가방을 들고 오기도 했다. 수연언니와 수연 언니네 엄마는 그전보다 기쁘거나 편안한 표정이었다. 아저씨는 전보다 환하게 웃었지만, 화악산에서 본 아저씨의 순박한 웃음은 가물가물해졌다. 아저씨는 어딘가 씁쓸해 보였다.

시간이 흐르고, 우리 가족은 더 이상 수연 언니네와 만나지 않았다. 아빠는 말했다. 사람이 저렇게 쉽게 변할 수 있냐고. 엄마는 수연언니네 엄마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배은망덕한 사람인지 얘기를 늘어 놓았다.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의 여름에 나는 초계탕도 먹고 도라지도 먹었다. 이제는 감자를 설탕에도 소금에도 즐겨 먹을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도시의 삶이 사람을 바꾸기도 한다는 걸 알고, 도시의 목소리가 다양한 의견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도시에서의 끝없는 비교로 느끼는 자격지심이 관계를 무너뜨리기도 한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옥수수를 한 알 한 알 떼어먹는다. 그리고 여전히 감자와 옥수수를 먹을 때면 그 더웠던 여름 초가집에서의 기억이 떠오른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웃던 어른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수연 언니와 수연 언니네 엄마, 엄마와 동생과 함께 선녀탕에서 놀던 여름을 기억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