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어떻게든 떠나기 위해 발버둥 치던 과정
나는 회사를 보는 눈이 사실 없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당시엔 한국의 디자이너에 대한 대우가 워낙 바닥이었던 터라 최저시급만큼의 낮은 연봉을 주는 곳도 뽑아달라고 사정을 해야 겨우 들어갈 정도였기 때문에, 나를 뽑아준 회사가 썩 마음에 차지는 않아도 항상 내가 맡은 역할을 다 하려고 노력했다. 필요할 땐 야근도 하고 집에서까지 잔업을 했던 적도 수 없이 많았다.
그러한 노력이 회사의 경영난으로 인한 폐쇄와 해고로 돌아왔을 때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 한 달에 겨우 160만 원 남짓을 주면서 회사를 다시 살려내기를 그나마 남아있던 몇 신입들에게 요구했던 무능력한 대표와 무리한 디자인 업무 스케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커리어를 빌드업하기는커녕 무의미한 업무를 하며 보냈던 시간들이 나에게 엄청난 우울감과 패배감을 안겨주었다. (이건 내가 퇴사를 빨리 결정하지 못해서 생긴 문제이기도 하다. 이 일로 인해 나는 처음 들어간 회사가 느낌이 싸할 경우 무조건 최대한 빨리 퇴사하는 걸 추천한다.) 사회 초년생이 되자마자 만난 두 경영자 모두 부조리한 방식으로 어린 친구들의 노동력을 뽑아먹으며 가스라이팅을 하고 이득을 취하는 걸 보자 그 실망감을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때 나는 내가 정말 세상에 쓸모없는 루저처럼 느껴졌다. 두 회사 모두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부모님은 디자인일 때려치우고 지방으로 돌아와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라는 잔소리를 늘어놓으셨고, 수중에 남은 돈은 한 푼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마음이 지쳐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포기하고 단념하기에 나는 아직도 꽤 이상주의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사실 마지막 다녔던 회사에서 재직할 당시에 퇴사 후 워킹홀리데이를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 계기가 뭐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당시 캐나다가 이민 가기도 쉽고 운만 좋으면 워킹홀리데이로 디자이너 잡을 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언뜻 듣고는 그때부터 조금씩 캐나다 워홀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는 이미 한국에서 디자이너로서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은 허황된 꿈이라고 생각했고 그보다 더 나은 삶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걸 알았을 때 나의 꿈은 절로 "해외에서 일하는 디자이너"가 되었다. 이러한 야심 찬 계획(?) 덕분에, 푼돈으로 전화영어를 끊어서 수능 이후로는 한 번도 손도 대지 않은 영어공부를 아주 조금씩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시험 영어가 아니라 오로지 회화로.
그 때문인지 회사가 문을 닫는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마음 한 켠으로는 나에게 기회가 찾아왔다는 생각을 했다. "이건 한국을 떠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라는 신의 계시일지도 모른다. 일단 나가면 지금보단 잘 풀리겠지. 여기서 난 더 이상 나빠질 것도, 떨어질 곳도 없어. 난 이미 밑바닥이니까..." 지금 보면 약간 무모하고 바보같이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조금은 더 붙잡고 싶었고, 더 경험하고 싶었다. 이대로 이건 내 길이 아니구나 하고 주저앉거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보다는 아예 새로운 터전에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뭔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렇게 난 회사가 문을 닫는다는 통보를 한 직후에 열렸던 다음 해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신청했다. 하지만 캐나다는 당시에 3000명 정도를 뽑았던 데에 비해 신청자 수가 꽤나 많아서 나에겐 인비테이션이 끝내 오지 않았다. 나의 목표는 그다음 해 6월 경에 한국을 떠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계속 기다렸다간 아무 데도 못 가겠다는 생각이 들어 차선책이었던 뉴질랜드를 가기로 했다. 그리고 나의 당시 계획 안에서 뉴질랜드는 디자이너 잡을 잡고 정착하기 위해 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전에 가장 비자를 따기 쉬운 호주에 가서 영어를 어느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해외 생활에 적응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가벼운 생각으로 호주에 갔는데... 지금 내가 가장 살고 싶은 나라가 될 줄은 몰랐다)
그렇게 난 2019년에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신청했고, 우여곡절 끝에 비자를 받은 후 변변찮은 영어실력과 250만 원을 들고 그 해 6월 말에 호주로 떠나게 되었다.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