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시작으로 한 새로운 여정
호주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엄청난 언어 장벽을 경험했다. 사람들이 하는 영어를 반절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특히 통장을 개통하기 위해 현지 은행에 간 날은 직원이 내게 뭔가를 얘기하며 안내할 때 그의 말이 완전히 외계어처럼 들리는 등, 나의 처참한 영어실력을 스스로 마주해야만 했다. 한국에서 어떻게든 영어실력을 끌어올리고자 하루 6~7시간씩 타이머를 재가며 미드 쉐도잉에 매달렸지만 다 큰 25살 성인이 고작 몇 달 만에 영어회화를 마스터한다는 건 판타지 같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외국인과 대화하는 데에 두려움이 별로 없었다. 한국인들이 문법이 틀릴까 봐 두려워서 회화실력이 더디게 느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애초에 스스로가 '완벽하게' 영어를 내뱉을 거라는 기대치가 없었기 때문에 더 용기 있게 다가가서 이야기할 깡이 있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오히려 그때보다 영어실력이 훨씬 향상된 지금의 내가 더 영어로 말을 할 때 조심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어찌 됐던 저런 뻔뻔한(?) 태도는 현지에서 내가 영어로 한 마디라도 말을 내뱉게 하는 용기가 되어주었다.
그런 한 줌 같은 영어 실력으로 나는 놀랍게도 호주 생활에 열심히 적응해 갔다. 당시 2019년 호주는 코로나가 창궐하기 직전인 시기였던지라 전 세계에서 온 외노자들로 과포화가 되어가는 상황이었기에, 현지 경력도 영어 실력도 변변치 않았던 나 또한 그런 상황에서 구직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중 아주 운 좋게도 한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아시안 슈퍼마켓에서 캐셔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그곳에서 현지인들과 가끔씩 스몰톡도 하고, 없는 지식을 쥐어짜서 한국 식재료를 설명할 수 있는 짬도 생겼다. 캐셔 업무 뿐만 아니라 물건 진열에도 몸을 좀 써야 하는 일이긴 했지만, 이런 타국에서 내가 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일했던 것 같다.
호주 생활이 즐거웠던 이유 중 하나는 호주에서 만났던 사람들 때문이었다. 당시에 친구 사귈 목적으로 딱 1달 등록했던 어학원에서 정말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그 친구들을 통해 파티에도 여러 번 초대되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가끔 타국에서 성격이 맞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서 안 그래도 힘든 타향살이가 더 힘들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호주에서의 생활을 돌이켜 봤을 때 대부분 좋은 사람들만 (물론 만났던 사람 모두가 그렇진 않았지만) 떠오르는 걸 보면 호주에서의 내 인복이 꽤 좋은 편이었던 것 같다. 국적과 언어를 막론하고 서로의 삶의 방향을 존중해 주고 응원해 주는 건강한 관계를 쌓을 수 있었다.
호주에서 살면서 해외에 정착해야겠다는 목표가 더 뚜렷해진 지점이 있었다. 바로 그 누구도 내 삶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각기 다른 수많은 이유들로 호주에 와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내가 살아온, 내가 추구하는 삶은 그저 그런 삶의 방식 중 하나일 뿐이고, 한국에서 줄 세우기 식 평가에 지쳐버린 나에게 삶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당시 한국나이로 27살이었던 내 주변에는 워킹홀리데이는 대학생이나 가는 거 아니냐며 타박하셨던 부모님과 이미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자리를 잡아가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기가 쉽지 않았지만, 호주에 온 이후로 해외에서 일하며 살고 싶다는 나의 꿈이 마냥 허황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코로나의 여파로 1년을 미처 다 채우지 못하고 귀국을 해야 했지만, 그 이후로도 나는 상황이 좋아지는 대로 해외에 다시 나가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일단 유의미한 경력을 먼저 쌓아야겠다는 생각에 몇 달 동안 밤을 새 가며 다시 디자인 포트폴리오를 준비했고, 우연한 기회로 외국계 스타트업에서 약 2년 만에 디자이너로 복귀하게 되었다. 회사와 인터뷰를 진행하며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채용담당자분이 나의 이력서에 호주 워킹홀리데이 경험이 적혀있는 것을 보시고 내가 외국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잘 맞을 거라고 판단하셨다고 한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임하면, 내가 이 전에 쌓아왔던 경험이 나중에 생각지도 못한 기회로 돌아오기도 하는 것 같다.
호주로 처음 떠난 지 4년이 흐른 지금, 나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새로운 나라인 네덜란드에 와 있다. 아직 새로운 것들이 많지만 나의 삶의 터전이었던 곳을 떠나는 것이 처음은 아니기에 잘 적응해나가고 있는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4년 뒤에는 과연 내가 어디에 있을지, 또 어떤 경험을 하고 있을지 기대가 되기도 하고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아직까지는 이곳에서의 삶이 꽤 만족스럽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