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욱정 Sep 15. 2019

마음건강을 위한 관계법 - 바라보기 [1]

존재에 가 닿는 시선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는 우리 삶의 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여러 제도적 장치들을 사회 안전망(Social Safety Net)이라 칭하듯, 가정·학교·일터에서 사람들과 만드는 돈독한 관계는 우리의 마음건강을 지켜 주는 정서적 안전망(Emotional Safety Net)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잘 지내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좋은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하려면 상대방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에 두어야 하고, 화초를 키우듯 관계를 돌봐야 합니다. 소중히 여기지 않고 방치하면 화초가 시들듯 관계도 시들어 버립니다.


관계가 순탄히 굴러가지 않을 때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은 내가 ‘상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입니다. 내가 어떤 렌즈를 통해 보는지에 따라 내 머릿속에 그 사람의 상(像)이 형성되고, 그 상 위에서 관계가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이해란 무엇이고, 올바르게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월이 길어지면 이해도 깊어질까


지금도 모든 글을 거꾸로 쓴다. 뒤집어서 비춰 보지 않으면 누구도 쉽게 읽을 수 없다. 습관이 되어 이제는 똑바로 쓰는 것보다 거꾸로 쓰는 편이 훨씬 빠르다. 어쩌다 똑바로 쓰려고 하면 글에 생기가 없다. 어느 날 내 자필 원고를 보여 주자 출판사 발행인이 깜짝 놀랐다. 25년 전부터 내 책을 냈는데도 내가 그런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을 처음 안 것이다. 그는 소리쳤다.

"이것이 뭐예요? 힌디어예요? 힌디어를 이렇게 잘 쓰시는 줄 몰랐어요!"

그 발행인뿐 아니라 나를 잘 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많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즐겨 마시는 차, 성격과 인생관까지도. 하지만 누군가를 알려면 그 사람의 내밀한 세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꾸로 쓴 내 글을 막힘없이 읽어 내려가는 편집자를 만났을 때 비로소 나 자신이, 나아가 내 문학이 이해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원고를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위의 글은 대학생 시절,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곁눈질하는 게 싫어서 그때부터 거꾸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류시화 시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문인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과 소통하며 지내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오랜 세월 함께 일해온 발행인도 사실 류시화 시인에 대해서 (그의 기준에서는) 완벽히 알지는 못했던 겁니다.


류시화 시인의 글씨



우리는 가족을, 친구를, 동료를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요?

함께한 시간이 한 해 두 해 쌓이면서 사람에 대한 이해도 그에 비례해 깊어질까요?


누군가를 깊이 이해한다는 말은 그의 마음 생김을 안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그냥 보고 알 수 있으면 좋겠지만 대개 우리의 시선에는 방해물이 붙습니다. 내면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이 방해물부터 걷어내야 합니다.



성격은 규정할 수 없다


대표적인 방해물은 이름표 붙이기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들’을 떠올려 봅시다. 그리고 ‘말 많고 활발한 사람들’도 떠올려 봅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을 겁니다. 의식적으로 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판단을 근거로 사람들에게 이름표를 붙이는 작업을 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방금 떠올린 그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이름표로 저장돼 있는지 알지 못할 겁니다. 그 이름표가 붙었다는 것을 알면 놀라거나 황당해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의 머릿속에 그렇게 존재한다면 어떨지를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함께 지내면서 상대를 관찰하고 관찰한 것을 토대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그가 ~라고 말했다’, ‘그가 ~한 행동을 했다’ 라는 몇 개의 근거를 가지고 우린 너무도 쉽게 ‘그는 ~한 사람이다’라는 결론으로 넘어갑니다. 그 순간 그는 이름표를 달고 우리 의식속에 박제되어 버립니다.



이름표를 붙이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한 두 개의 형용사로 한정짓는 건 존재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내면은 우주처럼 광활해서 평생을 걸쳐 탐색해도 다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는 일부분으로 사람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건 어찌 보면 오만이라 할 수 있겠지요.


또 하나는 열린 공간을 두어야 상대의 매력을 발견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에는 초두 효과(primary effect)라는 것이 있는데, 처음 입력한 정보가 단단하게 각인돼서 그 이후에 들어오는 정보에도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름표를 붙이면 그 시점에 눈과 귀는 닫히게 됩니다.

반면에 ‘이 사람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겠다는 마음은, 언제든 그 사람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준비가 되어 있고 틈을 열어 놓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관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요소는 때로 그렇게 불쑥 튀어나오는 새로운 모습들입니다.



사회적 정체성의 함정


올바른 시선을 막는 또다른 방해물은 직업입니다. 일을 하는 사람은 어딘가에 속해 있고, 그에 맞는 직함을 부여받습니다. 직함은 그의 일부분이었지만, 점차 그의 전부를 규정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임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부터 궁금해집니다.

일을 하지 않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직함을 부여받습니다. ‘백수’. 때로는 과장, 대리 등의 직책보다 더 강력하게 사람을 규정하는 직함입니다. 그의 내면에서는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사회적 시선은 그 모든 것들을 ‘백수’라는 정체성을 끼얹어서 덮어버립니다.


저는 한의원에 있을 때는 원장입니다. 원장의 페르소나를 쓸 때는 원장에 어울리는 언행을 합니다. 그래야 환자들과 올바른 의사-환자 관계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장이라는 직함이 제 전부를 나타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정체성 중 하나인 것이죠. 직업과 사람을 동일시하게 되면 직업 바깥에서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기 어려워집니다.



따뜻한 시선은 치유를 일으킨다


성격 이름표, 직업 꼬리표를 떼고 사람을 보는 것은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에너지가 듭니다. 하지만 에너지가 드는 만큼, 그렇게 바라보는 행위 자체가 치유의 시선이 될 수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특유의 습관은 무엇인지, 그의 세계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을 갖고 보는 것. 다른 말로 표현하면 ‘흥미’입니다. 상대를 알고 싶다는 단순한 흥미. 여기에 ‘판단’이 들어가는 순간 시선이 왜곡됩니다.

순수한 관심으로만 채워진 시선은 상대방도 느낄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알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위로를 얻습니다.


판단이 개입되지 않은 따뜻한 시선이 결국 도달하는 곳은 감정입니다. <당신이 옳다>의 저자 정혜신 박사는 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감정은 존재의 핵심이다. 가치관이나 성향, 취향 등은 그 존재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중요한 구성 요소들이지만 그것들은 존재의 주변을 둘러싼 외곽 요소들에 불과하다. 내 가치관이나 신념, 견해라는 것은 알고 보면 내 부모의 가치관이나 책에서 본 신념, 내 스승의 견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감정은 오로지 ‘나’다.


존재의 핵심인 감정에 시선을 맞추면 진정 마음을 주고 받는 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쉽지는 않습니다. 낯설기도 하고 의식적인 노력이 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감정에 시선을 맞추는 게 어렵다면, 그 외연에 있는 취향과 가치관에 관심을 가지는 것부터 시작해보길 권합니다. 그러면 점차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늘 서로를 지탱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