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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욱정 Apr 06. 2020

영어모임을 운영하고 깨달은 것 [1]

선생님의 자격

지난 한 달 동안 온라인으로 영어모임을 운영했다.

영어회화에 자주 쓰이는 패턴을 매일 전달해 주고, 멤버들이 그 패턴을 이용해 영어 문장을 만들어 제출하면, 내가 문법상 틀린 부분이나 어색한 표현을 고쳐 주는 방식이었다.

각기 다른 패턴으로 매일 반복되는 한 달 동안의 여정이었다. 경험수집잡화점의 점장 피터님이 멤버를 모아 주셨고, 10여 명의 멤버가 함께했다.


패턴과 패턴에 대한 설명이 매일 전달되었다



문법상 틀린 부분, 어색한 표현을 피드백 해드렸다



주말이 네 번 지나고, 모임은 어제로 마무리되었다.

지나고 나니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언제나 그렇듯.


체계를 갖춘 모임을 이끌어 본 건 처음이었고, 내게 많은 것을 남겼다. 그 경험을 통해 느낀 바를 적어 보려 한다.






한 번의 실패, 그리고 새로운 시작


시작은 작년 9월.

오직 영어로만 대화하는 카톡방을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나 스스로도 매일 영어를 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었고, 영어를 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모임 이름은 English Gym. 운동하는 것처럼 영어를 훈련해보자는 취지였다. 피터님의 도움으로 10여 명의 멤버로 시작했다.

규칙은 간단했다. 멤버들끼리 영어로 자유롭게 대화를 하고, 틀린 부분은 내가 고쳐주기로 했다.


야심차게 시작한 모임은 초반에는 순항했으나, 열기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점점 카톡방의 대화가 줄어갔다. 멤버들을 격려하고 재미있는 영상도 올리는 등 애를 써봤지만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았다.



영어로 대화한다는 규칙 하나로는 모임 유지가 어려웠다


결국 모임을 더 이상 유지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멤버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


씁쓸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가장 큰 어려움은 영어로 대화해야 한다는 부담감이었다. 그 외에 운영상의 문제점도 있었다.

크게 두 가지였다.


1. 모임의 종료 기한이 없었다. 끝이 정해져 있지 않은 모임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질 수밖에 없다.

2. 매일매일 수행해야 하는 미션이 없었다. 오로지 영어로 대화한다는 규칙 하나만으로는 참여 의욕을 끌어내기가 부족했다.



위의 두 가지를 보완하면 승산이 있어 보였다. 다시 한번 재정비해서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이후 틈틈이 모임 주제를 고민했고, 영어회화 패턴으로 정했다.


확신은 없었지만,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다.


단톡방이 넘쳐나는 시대다. 차마 나가기 버튼을 누르진 못하지만, 읽지 않고 방치해 두는 단톡방이 누구나 한 두 개쯤 있을 것이다.

영어모임이 그러한 단톡방 중 하나가 되지 않는 게 나의 작은 바람이었다. 내가 매일 올리는 영어 패턴이 누군가에게 점차 귀찮은 소음이 돼버리지 않는 것. 그것만 해도 성공이라 생각했다.




내가 뭐라고 영어를 가르쳐?


가면 증후군(Imposter Syndrome)

: 자신의 능력과 자신이 이룬 성과를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심리.


나는 영어 전공자가 아니다. 영어를 가르쳐 본 경험도 없다. 심지어 영어를 굉장히 잘하지도 않는다.


모임을 시작하기까지 망설임의 시간이 있었는데, 시작한 후에도 초반엔 내적 갈등의 순간이 여러 번 찾아왔다.

문장을 수정해 주려 하는데 적절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거나 내가 쓰려는 표현이 맞는지 확신이 없을 때. 그럴 때 내 안에서 뭔가 충돌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자격에 대한 의구심이 불쑥 솟아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그래, 초보라 해도 왕초보를 도와줄 순 있는 거야.’

내 욕심 같아선 100을 주고 싶지만, 설령 내 능력이 미치지 못해 50만큼만 주더라도 멤버들의 성장에는 도움이 되리라. 그렇게 희망적으로 생각했다.


주말엔 녹음 과제가 주어졌다. 짧은 글을 읽고 녹음하면 내가 피드백을 해 주는 것이다. 나는 영어 발음이나 강세 등을 이론으로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당연히 가르쳐본 적도 없고, 누군가의 스피킹에 피드백을 해준 적도 없다. 그런 내가 무슨 자신감으로 이걸 한다고 했을까?

글쎄, 굳이 근거를 찾자면 그저 나의 영어 발음이 나쁘지 않고, 한국인 치고는 조금 원어민스럽게 말할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막상 녹음과제를 올리고 나니 살짝 걱정이 되고 민망하기도 했다.

“녹음 피드백은 디테일이 조금 덜할 수 있으니 참고만 해주시길 부탁드려요”라고 괜히 기대치를 낮추는 멘트를 깔아 두려 했다가 그만두었다.


‘내가 내 능력을 먼저 존중하지 않으면 누가 존중해주겠어? 나는 평균 이상으로 영어를 잘하는 게 맞아. 멤버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거야'


누구든 뭔가를 할 줄 안다면 그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 기똥차게 잘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진정성만 있다면.


가르치지 않는 고수보다 가르치는 중수가 낫다.




보이지 않는 것의 힘


한 분 한 분 문장을 피드백해드리면서, 문득 이 피드백이 전부 온전히 내 머릿속에서 나온 생산물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피드백의 출처는 내가 몇 년에 걸쳐 쌓아 온 지식과 노하우였다. 물론 네이버와 구글을 참고할 때도 있지만 피드백의 핵심 생산 시설은 나였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그리고 컨디션만 멀쩡하다면 나는 영어 문장에 대한 피드백을 사실상 무한정 뽑아낼 수 있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나온 무형자산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책에서는 나의 무형자산과 세상의 유형자산을 연결할 것을 강조했다.

내 무형자산은 영어 문장을 보고 어색하거나 틀린 부분을 짚어내고 고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는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무형의 존재이지만, 내가 이 능력을 바탕으로 해 주는 피드백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경제적 가치를 지닌다.


나는 그간 많은 강의를 들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판매할 수 있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여겼다. 이번에 작은 시도를 통해 그것을 몸소 체험하니 더욱 신기했다.




냉정과 열정 사이


한의사는 아픈 사람을 치료해 준다. 의료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돈을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순간, 생산자 - 소비자 또는 서비스 제공자 - 고객 의 관계가 형성된다.

이 관계 안에서 수많은 갈등의 순간이 생긴다.

10000원을 받았다고 해서 칼로 무 자르듯 딱 10000원어치의 서비스만 제공한다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객의 반응과 요구는 예상을 벗어날 때가 비일비재하다.


진료 현장에서도 종종 겪었던 갈등의 순간이, 영어모임을 하면서도 찾아왔다.


하루 3문장을 만들고 그 3문장에 대한 피드백을 해 주는 게 약속이었다.

그런데 4문장을 만들어 제출하시는 경우가 있었다.

어떻게 할까. 약속대로 딱 3문장만 피드백해 줄 것인가? 아니면 오늘은 4문장 피드백을 해 주고, '다음부터는 3문장만 해드립니다' 라고 콕 짚어 이야기를 할 것인가?

크게 망설이지 않고 내린 결론은 아무 말 없이 4문장 피드백을 해 주는 것이었다.


제출 기한이 지나고 나서 문장을 보내는 분들이 계실 때도 선택의 기로에 서곤 했다.

제출 기한을 지켜달라고 부탁을 드려야 하나? 한 번은 그냥 넘어가고 몇 번 반복되면 말씀드릴까?

규칙을 만들고 운영을 하는 입장이 되니 조심스러워졌다. 사소한 결정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나의 결론은 아무 말 하지 않고 피드백해 주는 것이었다.


멤버들 중 한 분이 내게 물어보셨다.

다른 사람들의 피드백도 볼 수 있게 피드백을 함께 공유하면 어떻겠냐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모두의 영어실력 향상을 위해서는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게 바람직하지만, 만약 그리 한다면 1:1 피드백이라는 특별함이 사라지는 걸 감수해야 한다. 또한 피드백 한 개에 책정된 금전적 가치도 낮아지게 되는 셈이다. 원칙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이번에는 정중하게 말씀을 드렸다. 공유는 어렵겠다고. 대신 다른 분들의 문장에서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질문을 주시라고 말씀드렸다.


진정성을 유지하면서 원칙을 지키는 것.

곧을 땐 곧고 유연할 땐 유연할 줄 아는 것.

리더의 중요한 덕목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선택의 기로에서 흔들릴 때 중심을 잡도록 도와준 생각 하나가 있다.


나는 이번엔 선생님이었지만, 아직까지도 학생 포지션이 더 익숙하다. 지난 영어 공부 역사에서 많은 영어 선생님들로부터 가르침과 도움을 받았다.


열정은 결코 매일 샘솟는 게 아니다. 달려보려는 열정이 생겼을 때 추진력을 얻지 못하면, 다음부터는 달리려는 노력조차 안 하게 된다.

정말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충만할 때 선생님이 그에 응답해 주지 않으면 서운해진다. 반면, 용기를 내서 한 발짝 더 나아가려 했을 때 끌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큰 힘이 된다.


나는 학습자로서 그 점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열정이 눈에 보이면 있는 힘껏 밀어줘야 한다는 걸. 마음먹고 열심히 하려는 분들을 김새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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