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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워킹맘 손엠마 Jul 09. 2019

할머니는 설거지 하는 사람

 아이가 바라본 친정 엄마의 모습에 대하여 ㅡ 

두 녀석 저녁을 먹이고 과일까지 다 먹고 나면, 친정엄마는 방으로 뉴스를 보러 들어가신다. 하루 일과가 거의 마무리 되었으니, 쉬고 싶어서 방에 들어가시는 건데, 첫째는 속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또 할머니를 따라 방으로 들어간다. 기어다니는 것에 능해진 둘째도 요새는 오빠바라기라서 덩달아 들어간다. 그래서 아이를 봐야하기 때문에 나도 들어간다. 결론적으로 30평이 넘는 집인데, 조그마한 방 안에 4명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꼴이 된다. 그렇게 우리들만의 수다와 이야기가 시작되곤 했다. 그 날도 나는 첫째에게 조잘거리며 질문을 했다. 


"지후야. 아빠는 뭐하는 사람이야?"

"음... 회사 다니는 사람!"

"지후야, 그럼 엄마는 뭐하는 사람이야?"

"음... 회사!"

"그럼 할머니는 뭐하는 사람이야?"

"할머니는 설거지 하는 사람"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답변에 친정엄마는 조금 민망하셨던지, 물을 마시겠다며 방을 나가셨고, 나도 조금은 벙쪄서 '하하하...'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마음이 아파왔다. 


순간 첫째 아이가 좋아하는 작가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이 떠올랐다. (물론 아이는 돼지책의 심오한? 내용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고, 앤서니 브라운의 '기분을 말해봐'와 '우리 아빠가 최고야'를 좋아한다.) 내용은 대강 이러하다. 

아침에 아이들과 아빠는 등교, 출근 준비를 하며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밥 주세요."  "여보 밥 줘"

엄마는 아침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그리고 나서야 일을 하러 간다.


저녁이 되어 아이들과 아빠는 하교, 퇴근을 하며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밥 주세요." "여보 밥 줘"

엄마는 음식을 만들고, 저녁을 차리고, 또 설거지를 하고, 다림질을 하고, 내일 아침을 또 만든다.


어느 날, 아이들과 아빠가 집에 돌아왔을 때, 집에는 엄마는 없고 엄마가 남긴 메모 한 장만이 있었다.

"너희들은 돼지야."  


흰 색 바탕에 7글자만 써있었지만, 중간에 매직 아이로 'dog'가 쓰였다 지워진 것 같은 건 느낌적인 느낌인가? 어쨌든 엄마의 가출로 모두가 집안일을 나누고, 엄마는 멋지게 '자동차 수리'를 한다는 결론이다.


이 책이 무려 2001년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18년이나 되었고, 맞벌이 가족의 비율이 약 50%에 이른다고 하지만 아직 가사노동에 여성의 노동력이 현저히 많이 사용되는 것에는 드라마틱한 변화가 없는 듯 하다.




아이는 물론 별다른 뜻없이 할머니는 설거지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을 수도 있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조금은 불편해졌다는 것은 '나도 엄마를 그간 무의식 중에 그렇게 대했던 것이 아닌가'하는 뉘우침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조금 바쁘니 이런 저런 일들은 엄마가 조금씩 도와주시겠지. 라는 것.. 하지만 집안일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이 집안일이란 것이 해도 티도 안 나거니와, '시간이 나는 사람'이 집안일을 하자라는 전제를 깔게 되면 그 '시간이 나는 사람'은 대부분 고정되어 버리고 만다. 


게다가 친정엄마와 나는 '집안일'에 대한 관점이 현저히 다른 사람들이다. 나에게 집안일이란 최대한 심플하고, 생존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평균적인 수준(주 2회 청소기, 주 1회 물걸레)으로만 유지한다는 생각이 있다. 하지만 전업주부로 거의 평생을 사신 친정엄마는 좀처럼 쉬질 않는 프로홈케어전문가다. 그래서 친정엄마 눈에는 내가 '게으른 엄마'고 내 눈에는 친정엄마가 '사서 고생하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극단을 달리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우리 아이의 눈에 보이는 할머니의 모습이 거창하지 않더라도 좀 더 행복하거나,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요리, 설거지, 집안일 이런 것이 아니라 재봉틀로 옷을 만들며 행복해 하는 할머니의 모습, 여행 다녀온 사진들을 앨범으로 정리하며 웃는 할머니 모습, 꽃 사진 찍는 할머니 모습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이런 모습으로 기억되려면 이런 경험의 '빈도'를 늘려야 하기 때문에 이는 곧 머니와 나의 육아 시간이 늘어남을 의미하겠지만, 그렇더라도 좋다. 5년 후에는 이런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다. 


"지후야, 할머니는 뭐하는 사람이야?"

"음, 할머니는 행복한 사람!"

"할머니가 어떨 때 행복해하시는 것 같아?"

"음, 사진 찍을 때, 여행 다닐 때, 블라블라블라......그리고 우리 간식 만들어주실 때!"


※ 참고로 우리집에서 설거지를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은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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