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주변도 병들게 합니다
’서울 사람‘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말을 참 잘한다’이다. 세련된 억양과 적시적소의 알맞는 단어로 구성된 조리 있는 말솜씨로 할 말을 하는 모습이 내겐 양면적이었다. 좋아 보이기도 했지만 저렇게 말로 다 쏟아버리면 텅 빈 강정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서울토박이인 신랑을 만나 치열한 부부싸움을 하다 보니 말의 전투력이 상승되며 예기치 않은 발견을 하게 되었다.
어랏! 사고에 질서가 잡히네
생각지도 못한 발전이었다. 물론 아기를 낳으며 쇠약해진 탓도 있었겠지만 원체 말하는 걸 싫어했다. 아이러니하겠지만 요가강사이자 운영자로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살다 보니 직업으로써의 말의 무게가 때때로 무겁기도 했고 일 대 다수라는 대화상대에 소진되어 늘어진 시금치처럼 침대에 누워있는 날들에서 비롯된 에너지 보호막이기도 했다.
과거의 난 사실 그렇게 치밀한 편이 아니었다. 어떠한 사건에서 일어나는 핵심이슈를 놓고 자신을 꺼내 고름을 도려내고 살을 봉합하는 과정을 뭉개고 사랑으로 덮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요가를 하기 전까지. 그런데 요가를 하다 보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해서 도저히 모른 체 할 수가 없어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문제는 관계인데 미혼일 때는 문제를 또렷하게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거의 해결되어 비교적 혼자서 작업해도 큰 무리가 없었다. 그리고 나의 모순과 치졸함과 위선 등등의 오물들을 타인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아도 되어서 표면상으로 요가하고 명상하는 여자로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데 별다른 걸림이 없었다.
결혼 생활을 시작하자
이 방법은 더 이상 먹히지 않았다
대화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해결되지 않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나는 내 감정을 말로 꺼내는 작업을 부부싸움을 통해 익혀나가기 시작했다. 거칠게 때로는 며칠 동안이나 아닌 건 아닌 신랑과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다행인 것은 신랑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사람이었고 그것이 공감을 바라는 나를 채워주지 못할 때는 있었지만 문제해결에는 최적이었고 이성 없는 공감은 앙꼬 없는 찐빵이라는 사실에는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불편하거나 짜증 나거나 억압되거나 화가 나는 여타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올라오면 우선은 참았다. 그리고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후 아무도 몰래 나 혼자 조용히 명상이든 사고든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혼을 하자 바로바로 들켰다. 그리고 참는 시간 동안 감정은 더욱 커지고 단단해질 뿐이었다.
부부관계처럼 밀접한 관계에선 숨겨지지가 않았다. 우리의 사정상 24시간 붙어있기도 했지만 신랑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기가 막히게 캐치 하는 사람이었고 그것을 절대 참지 않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자기도 모르게 오랜 시간 몸, 마음, 정신이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거라 내 입장에선 아닌 척 부인할 수도 없었다.
더욱이 참는 동안 감정이 더 격해져서 결국 문제해결을 해야겠다는 의지보다는 묵은 감정에 짓눌려 버리는 사태를 이제는 혼자가 아닌 가족이 맞이해야 했기에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었다. 문제의 발생지에서 대화를 시도했다면 그리 커지지 않았을 것이고 상대도 바로 인식하고 인정할 수 있는 것들도 묵은 감정으로 대하다 보니 좋은 분위기나 말이 나오기 쉽지 않은 것이다.
내 딴에는 참으며 문제를 차근히 바라보자는 시도였지만 그 사이 관계가 곪아버리고 있었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몸을 통해 오랜 시간 동안 병을 키워온 것도 나였다. 내 몸은 애석하게도 참는 게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같은 문제로 우리 부부는 수십 번 싸우기를 반복했다. 신랑은 문제다 싶으면 바로 고치는데 그렇게 바로 고쳐지는 게 늘 내가 입에 달고 살던 인간은 변화한다였고 나는 그 반대라는 사실에 아주 당황스러웠다. 신랑의 매커니즘은 단순했다.
온전히 인정하고 바로 잡고 고치고
문제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
그러기 위해 내가 해야 할 건 참지 않기였다. 참아봤자 들키고 시간이 지나면 고약해져서 들추기가 겁날 정도가 되지 않았던가! 표현을 함에 있어서는 세련되고 교양 있는 서울사람들이 쓰는 표준어를 참고하라고 나를 서울이라는 땅으로 이식한 건가 싶기도 하다.
솔직하게 인정하고
참지 말고 표현하기
다만 나도 너도 우리도 유익하고 친절하게
내 병도 이제는 수명을 다했으면 좋겠다.
대화라는 치유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