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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forest Apr 12. 2020

화가들은 왜 비너스를 눕혔을까?

우리가 '여신' ' 칭송을 멈춰야 하는 이유


화가들은 왜 비너스를 눕혔을까

저자 이충열 한뼘책방




솔직히 말하자면 난 이 책을 읽기 싫었다. 화장을 하면서 자기만족이라는 둥 하는 그런 식의 자기 위로를 더 이상 맘 편히 할 수 없게 만들만한 책이었다. 남들이 말하는 '예술'을 예술로 보지 못하게 되고 문제점만 보일 것이고, 시각적 불편함만 늘어갈 것이 뻔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당연히 한 가지겠지. 이런 것들을 직면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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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드는 의문이었다. 벗은 여자의 몸이 예술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교과서에서, 책에서, 영화에서 보는 흔히 말하는 '예술작품' 은 나체의 여성이니까. 현실은 내 질문을 막았고 절대 누군가에게 던져볼 수 없는 물음표로 남았다.


내적 질문들은 책 속의 공간에서 해소가 되었다. 이충열 작가님은 우리에게 예술로 포장되던 외설을 풀어헤쳤다.


우리가 보는 명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소위 '성녀'이고 그들이 창조해낸 여성의 모습은 지극히 남성들의 기쁨을 위해 만들어진 허상이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 책 한 부분을 적어본다.



"다시 강조하자면 역사를 '객관적'으로,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고 여겨온 '그림'은 단지 백인이고, 시스젠더 남성이면서 이성애자이고, 비장애인 비청소년으로서 사교에도 능해서 권력자들을 가까이 둘 수 있었던 일부 기득권층의 욕망과 시선의 재현물입니다. "




이 책은 나의 (예술감상에서의 혹은 여러 가지) 시선에 큰 변화를 줬다. 앞으로 수많은 예술작품들을 경이롭고 숭고한 기독교 예술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남성들에 의해서, 남성들을 위해서 그려진 부자연스러운 고깃덩어리로 볼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라고 본다.










좌는 여성작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 우는 남성작가 크리스토파노 알로리







성경의 외경인 다니엘서 13장에 있는 내용인 수산나와 두 노인 이야기를 짧게 하자면 -수산나는 목욕 중 두 원로가 침입해 자신들과 동침을 하지 않으면 불륜을 저질렀다고 소문을 낸다며 협박을 했다 수산나는 도와달라고 소리쳤고 두 원로는 거짓말을 한다. 이것으로 재판까지 가게 되고 재판관이 두 원로는 수산나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러나 위증임이 밝혀지고 수산나는 목숨을 구하게 된다- 이렇다. 결국 수산나에게 처했던 상황은 성범죄이고 두 그림은 성범죄 상황을 재현했다고 볼 수 있는 그림이다.(작가 아르테미시아는 자신에게 성범죄를 행한 타시와 이에 대한 적극적 대안을 마련하지 않은 아버지를 두 노인의 얼굴에 그려 넣는다.) 안타깝게도 수산나의 표정을 통해서 작가의 성별을 쉽게 맞출 수 있다.. 알로리의 그림에서는 오히려 수산나가 유혹하는 듯이 그려졌다. 그렇다. 소위 '꽃뱀', 그때도 있었다.






이 책의 제목은 화가들은 왜 비너스를 눕혔을까?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도 친절하게 나와있다. "성적대상화를 위해 곡선을 강조하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균형을 잡으며 서 있도록 그리는 것은 기술적으로 어려웠을것 입니다. 그럴 때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이 있었으니, 바로 비너스를 눕히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남성들의 취향에 알맞으면서도(관능적) 자연스러운 '예술'처럼 보일까 고민하다가 피사체를 눕혀버린 것이다. 단순히 그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봐온 예술은 그런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관능적이고 수동적이면서 예술적으로 보일까 고민해 도출된 결과물이었다.



과거의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남성의 모습이 현재와 별다를 것 없다는 점은 너무 고통스러웠고 화가 났다. 몇백 년이 지난 지금도 성적 대상화되고 강간이 미화되고 피해자가 손가락질받는 사회는 언제쯤 평등이라는 단어가 어원 그대로 실현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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