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엽 Jun 30. 2024

진짜 잘 하셨습니다

연차 휴가비와 하계 휴가비 전액을 부인께 드렸다는 경비원께

거센 비바람 소리에 새벽 일찍 눈을 떴습니다. 아파트 내 돌아보기 위해 현관을 나섰습니다. 74세 경비원께서도 순찰을 돌다가 저와 만났습니다. 비바람에 셀 때는 위험하니 순찰도 자제하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아입니더. 바람불어도 순찰을 돌아야 입주민이 덜 불편할 꺼 아이겠습니꺼? 혹시나 나무가 부러져도 입주민이 다칠까 봐 순찰을 돌았는데, 아직까지 특별한 기 없는 거 같습니다. 이 시간에 우짠 일입니꺼? 바람 소리에 잠이 깬 모양이지예. 잠깐 경비실에 가셔서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가시지예."


그렇게 경비실에 새벽 일찍 단 둘이 앉아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눕니다. 제가 이 아파트에 이사오기 전부터 오랜 기간 근무하셨던 분이라 아파트나 입주민들 사정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분이지요. 심지어 웬만한 입주민 집의 해당 호를 정말 많이 알고 계셨고, 그집 가족들 사정도 훤히 알고 계십니다. 저는 여기 이사온 지 10여 년이 되어 오가는 분들 얼굴은 알아도 그분들이 몇 호에 사시는지는 거의 모르거든요. 


경비실 창문 밖으로 거세 비바람이 몰아치지만 실내는 평안합니다. 이렇게 둘이서 커피를 마시니 진짜 맛도 좋았습니다. 저와 대화를 할 때는 80% 이상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저도 평소에 지인들로부터 "경청"을 잘 해준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있는데다가 이렇게 연로하신 분의 삶을 놓고는 오롯이 그분의 인생을 접하기 위해 일부러 경청하게 됩니다. 신나게 당신의 이야기를 하시다가


  "아이고 맨날 내만 말하네요. 미안심더."

라고 웃음을 짓습니다. 어쩌다 제 인생에 대해 질문하면 가급적 간결하게 제 삶을 들려드립니다. 그러면 다시 그분의 인생 이야기로 넘어가게 됩니다. 


담소를 나누다가 문득 이렇게 말합니다. 


"있다 아입니꺼. 요번 참에 작년 1년 동안 연차 휴가를 거의 쓰지 않았다고 전액 휴가비로 받았습니더. 그리고 여름 휴가비 3일치도 한꺼번에 주시데요. 동대표 회의 시에 우리 같은 사람들 입장에서 편리를 봐주시서 진짜 고맙심더."


지난 달 입주자 대표회의 시에 예전 자료를 보니까. 여름 휴가를 3일간 실시하는데 맞교대를 하다 보니 하루는 대체근무자를 구해야 할 사정이더군요. 그러면 그 대체근무비를 휴가가시는 직원의 수당에서 지급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면 말로는 3일치 휴가비를 지급한다고 하고는 하루 치를 삭감한 결과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입주자 대표회의에서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휴가와 휴가비 지급은 우리 아파트 '취업규칙'에 분명 3일 실시와 3일치 지급으로 명시되어 있으니 대체근무자를 구할 시에는 대체휴가비도 아파트에서 지급해야 한다. 물론 평소에 직원들 개인 사정이 생겨 대체 근무를 쓸 때에는 해당 직원의 수당에서 지급하지만 휴가비는 엄격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제안했더니 대부분 입주자 대표들이 동의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연차휴가비도 지출을 줄이려고 강제로 연차 휴가를 쓰게 하지 말고, 본인의 희망대로 해주고 가지 않는 연차 휴가비는 반드시 지급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 돈 아끼지 말고 오히려 관리사무소 차원에서 행하는 각종 공사비를 절감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고 강조했습니다. 


저희 아파트는 지금껏 30여 년 간 공사비 관련 잡음이 없을 정도로 회장이나 관리소장이 투명하게 집행하여 입주민들의 강력한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번에 오신 관리소장님이 전기기술자 출신이라 입주민들 집에 전기 관련 일이 생기면 직접 가셔셔 대부분 해결해 주셨습니다. 아주 사소한 전기 공사라도 사람을 부르면 최소한 50만원은 주어야 한다더군요. 그런 면에서 우리 소장님은 대략 계산해도 수백 만원 정도 이익을 아파트 입주민들에 남겨 주신 것이 되지요. 그리고 소장님께서 입주민들에게 워낙 친절하고 업무에 정성을 다하여 오래 오래 근무해 달라는 요청을 받을 정도랍니다. 


담소를 나누는 74세 경비원께서 1년 동안 쓰지 않았던 연차휴가비와 여름휴가비를 동시에 받으니 상당한 금액이 되더랍니다. 그래서 그 돈을 혹시 어디에 쓰셨냐고 슬쩍 물으니까,


"집사람에게 모두 주었심더. 집에 놀러온 손주에게도 주었심더. 혹시나 내년에는 연차휴가비를 받지 못할 사정이 생길지도 몰라서 집사람한테는 10년 이상 열심히 근무했다고 포상금을 받았다고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좀 하였심더. 이해해 주이소."


"아이고 이해를 하지요. 진짜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모님과 딸, 손주에게 전액을 주시면 쓸 돈이 없어서 어떡합니까?"


그러자 지갑을 슬쩍 보여줍니다. 5만원 짜리가 꽤 들었네요. 연금받는 것이 지갑에 그대로 들었다면서 언제 저랑 식사할까요 라고 다시 제안합니다. 월급의 일부도 당신께서 쓰신다면서 한번 자리를 만들자고 말씀하시네요. 하지만 저는 그건 아니라고 거절하면서 나중에 기회를 봐서 제가 한번 대접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서로 서로 대접하겠다고 시루다가 결국 약속은 잡지 못했지만. 



며칠 전에도 말했던 것처럼 지금이 74세시니 앞으로 더욱 건강하셔서 80세까지 근무하여 전국에 기록을 한번 세워보자고 했었지요. 이번엔 손사래도 치지 않으시고 열심히 근무하겠노라고 하시네요.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경비원의 연차휴가비 그리고 여름 휴가비 사연을 말했더니 아내가 저를 놀리네요. 


"그 경비원 당신보다 형편이 훨씬 낫네. ㅋㅋㅋ."



작가의 이전글 살다 보니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