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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ul 07. 2024

어머니가 종교적인 존재였지요

김옥림의 <품위 있게 나이든다는 것>을 읽다가

서점에 들러 책을 몇 권 구입했는데, 최근 왕성한 집필활동으로 화제가 된 김옥림의 <품위 있게 나이든다는 것>이른 책도 함께 샀습니다. 현직에서 물러나 본격적인 노년세대가 된 제 입장에선 이 제목이 눈에 확 띄더군요. 책의 전체 내용 방점은 '품위있게'라기보다는 현명한 노년세대의 삶이라고 여겨집니다. 물론 그렇게 현명한 노년세대의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품위있게'로 연결될 터이지요. 노년의 삶을 제대로 누리면서 보내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었고 그 내용들이 공감이 많이 가더군요. 그중에 하나 "종교"의 중요성, 의의가 보입니다.


저는 특별히 믿고 있는 종교가 없습니다. 그래도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정말 독실한 불교 신자이셨습니다. 사월 초파일 생이시라 운명적으로 부처님과 연결되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어린 시절 스님들께서 탁발하려 다니시다 우리집에 오시면 어머니께서 스님이 들고 있는 보자기에 쌀이랑 보리쌀을 가득 넣어드리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제 어린 마음에 우리집 형편도 넉넉지 않은데 왜 스님에게 저 귀한 쌀과 보리를 한 가득 넣어드릴까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만 한번도 어머니께 여쭤보진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하시는 일엔 다 이유가 있겠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음력 사월 초파일은 시골 농사철에 한창 바쁜 시기입니다. 그런데 그 바쁜 날에도 그날만 되면 어머니께선 주황색 한복을 곱게 입으시고 새벽부터 집을 나서서 절에 가셔서 하루 종일 계시다가 오셨습니다. 아버지와 우리 3남매는 어머니가 절에 가시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한번은 사월 초파일 전날 밤에 제가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엄마, 내일 절에 가는 것은 좋은데 너무 멀리는 가지 마래이. 가다가 오다가 사고라도 나면 내가 뛰갈 수 없다 아이가. 그라고 저녁 늦게 오다가 해라도 지만 우야노. 낮에 해 있을 때 왔으마 좋겠다. 내일 들일은 내캉 히야랑 다해 놓을 끼끼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잘 갔다왔으마 좋겠다."


어머니께선 다음 날 절에 갈 채비를 밤늦게까지 하다가 제 말을 듣고 가만히 저를 바라보십니다. 초등학교 5~6학년이 할 말이 아닌 듯했겠지요. 지금 제가 말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제가 온전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훗날 어머니께서 말씀해주셔서 알고 있는 내용이긴 합니다. 어머니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시더니 저를 가만히 안아 주셨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께선 저를 유난히 많이 안아 주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형과 여동생에겐 그렇게 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안아 주셔서 저는 정말 좋았지요. 그렇게 저를 꼭 안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니는 얼라가 되가 우째 그리 걸망시럽노. 느그 아부지도 안 하는 말을 니가 다 하네. 니는 집에 일 신경쓰지 말고 그냥 공부만 열심히 하면 안 되겠나. 느그 아부지하고 히야캉 일하만 되지 니까지 들에 나올 필요 없다. 그라다 공부시간 부족하면 안 된다이. 그래 니 말따나 내일 조심해서 갔다 오께. 낮에 해 있을 때 오꾸마. 우째 니는 내 걱정을 그리 기피 기피 해주노. 고맙데이."


얼마 안 되는 논밭이지만 들일은 일거리가 많았습니다. 어머니 말씀 중에 유일하게 지키지 않았던 것은 '공부 하느라 들일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가족들이 들에 나가 고생하고 있는데, 저 혼자 책상에 앉아 공부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지요. 중학교 3학년 때는 저 혼자 지게에 쟁기를 짊어지고 우리집 손한 암소를 끌고 나가 1300평 논을 이틀 그리고 반나절 갈았던 일도 떠오릅니다. 체격에 비해 힘이 좋았기는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중학교 3학년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 범상한 일은 아니지요. 혼자 들일하고 있으면 바료 옆 밭에 계신 아재가 막걸리를 갖다 주며 마시라고 권유하여 중학교 3학년부터 막걸리를 마셔 술김에 일한 적도 많습니다. 물론 어머니 아버지께는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사정 사정했지만 그날 밤에 마을에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요.


어머니께선 공부 시간에 들일하지 말라고 단단히 말씀하셨지만, 저는 그래도 열심히 농사를 도왔습니다. 낮에는 들일하고 밤에 집에 돌아와 책 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정신 차리려 해도 주경야독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저녁 먹고 책상에 앉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책상에서 꾸벅 꾸벅 졸기도 하고,  책상에 엎드리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잠깐 존다고 생각했는데 한 시간 정도를 책상 위에서 졸았던 듯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살짝 깨우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야~야, 니 그라다가 몸 상한다. 공부뽀다도 몸이 우선이지 그렇게 불편케 자지 말고 이불에 들어가 편케 자거라. 으잉."


어머니가 가져다 주신 간식을 앞에 놓고 이불 속으로 발을 쑥 넣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마주 앉아 깊은 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조웅전> 이야기를 정말 좋아하셨지요. 밤늦게 그런 간식을 먹으면 몸에 좋지 않을 텐데 당시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 해주신 간식이라 그냥 맛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이야가를 나누다 보면 어느 새 자정 12시가 넘어가기도 했지요. 지금 어머니가 곁에 안 계시니 그때 일이 정말 많이 생각납니다. 어머니 살아 계실 적에 좀더 효도를 할 걸 하는 생각이 정말 많이 듭니다. 마을에선 효자라고 칭찬을 많이 했지만 제가 효도를 많이 했다면 그 마음이 선한 어머니께서 55세 좋은 나이에 세상을 버릴 이유가 없었겠지요. 어머니께서는 학교 문턱에도 가시지⁷ 않았고, 글자도 모르셨지만 정말 남다른 교육 철학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아들 공부를 위해선 온몸을 희생하시면서도 '늘 어려운 사람들 도와야 한데이. 남에게 피해 주만 나중에 내 자식한테 불벼락 떨어진다이.' 같은 교훈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제 삶에서 조금이라도 힘들다고 여겨질 때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비록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늘 저를 지켜 주는 듯합니다. 저와 아내 그리고 우리집 3남매를 항상 지켜주시고 계실 듯한 어머니가 저에겐 영원한 종교적 존재랍니다.



참! 갑자기 떠오른 생각입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다음 해에 아버지도 세상을 버리셨는데, 간경화로 병원에 입원하시던 때 병원에 찾아온 목사님이신지 전도사님이신지 확실히는 잘 모르지만 어떤 분의 제의에 따라 종교에 귀의하시더군요. 돌아가시기 이틀 전 쯤이셨지요. 평소엔 종교에 관심도 전혀 없으셨던 아버지께서 죽음을 앞두고 종교를 믿으시라는 제의에 단번에 허용하셨던 것도 눈에 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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