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에서 후배들 테이블에 끼여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한참 들었습니다. 퇴직하면 가장 먼저 모임을 정리하려 했는데, 막상 어느 모임을 정리할지 고민이 되더군요. 그래서 그냥 이대로 가지 뭐 하는 심정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평소에도 남의 말을 잘 들어준다는 평을 듣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때 즐거움을 느끼는 법이지요. 그래서 엔돌핀은 기분이 좋을 때, 기적의 호르몬 다이돌핀은 감동적일 때 나온다. 아드레날린은 기분이 나쁠 때 분비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아드레날린이 나오는 게 싫어 평온만을 추구하면 기적의 홀몬 다이돌핀은 맛볼 수가 없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신나게 할 때 엔돌핀이 분비된다고 하니 남으로 하여금 마음껏 이야기하개 하면 정말 좋은 일하는 것이지요. 하기사 남의 이야기를 끝도 없이 들어준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쉽던가요. 본인은 신나게 떠들지만 듣는 이는 별로 재미가 없을 땐 난감하기도 합니다.
어느 후배가 말합니다.
"형님 있잖아요. 우리집 딸래미가 공부도 좀 잘 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아이 외삼촌도 교직에 있고, 집안에 교육자가 많이 있으니 딸도 사대나 교대로 가서 선생님 하면 일등 신부감에 세상 사람들 인정 받는 것 아니냐고 아무리 말해도 안 듣네요. 딸은 에니메이션 캐릭터 같은 분야에 관심이 많이 공부를 하면서도 공책이나 컴퓨터에 늘 그림을 그렸거든요. 초등학교 때는 그냥 취미겠거니 하는 생각에 지켜고 보고 있었는데, 이제 중학교 3학년이라 내년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본격적으로 입시를 준비할 낀데 걱정이 많네요. 어디 한의대라도 가주면 저도 평생 잊어뿌고 살 낀데 아~가 도통 제 말을 안 들을라 캐요. 우짜만 좋겠심니꺼."
이럴 때 대답 잘 해야 합니다. 단정적으로 말하면 후배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남의 귀한 딸 진로를 망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의견을 밝히지 않고 딸의 진짜 의중을 진지하게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후배가 그런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냥 집안에서 딸 아이가 있을 때 지나가는 말로 향후 진로를 가볍게 물어보고 딸도 가볍게 답한 것이 전부라고 합니다. 아이 엄마 생각은 또 어떤가 하고 물었습니다. 딸의 인생이나 향후 진로는 어디까지나 당사자인 딸 아이의 판단과 견해가 가장 중요하고, 부모의 생각은 그냥 참고용이라고 답하려다가 잠깐 멈추었습니다. 우리집 아이들 3남매가 클 때 저와 아내는 아이들 학교 생활이나 진로 결정에 진짜 많이 개입했었기에 남의 집 딸 인생이나 진로 이야기를 가볍게, 함부로 지껄여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질문할 때마다 후배의 표정은 오히려 신이 난 듯 말이 많아집니다. 아무래도 자신의 가족 이야기가 나오니 편하게 답하는 것이지요. 아이들 어렸을 때 멀리 가족 여행 간 이야기부터 숱한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어느 집에서나 있을 수 있는 내용이지만 사람들 앞에서 신나게 내놓을 기회는 생각보다 적겠지요. 더욱이 제가 자꾸 말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이끌어 가니 그 후배가 더욱 신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후배의 사연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제 견해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마음껏 이야기하다 보면 문제 해결책도 그 안에 있을 듯해서요.
또 다른 후배도 자신의 아이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밝고 명랑한 것은 좋은데 아무리 봐도 예의가 없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이제 와서 예의 같은 것을 언급하려니 아이의 반발을 살 것 같고, 그렇다고 그냥 놔두려니 어디 가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까 봐 걱정이랍니다. 자기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엄격한 가정 교육을 받았기에 예의, 예절의 중요성을 몸소 체험했다면서 요즘 아이들은 대체로 버릇이 없다고 혼자 중얼중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지요.
"그기 바로 꼰대인 기라. 우리가 지난 날 부모로부터 받은 예절 교육 그 자체는 분명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그런 것에 경직되어 내 아이들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강요하면 그건 진짜 꼰대 사고방식이 되는 거라네. 아이들에게 강요하지 말고 표 안나게 슬쩍 부드럽게 예의를 전하는 방법을 찾으면 좋지 않을까. 그리고 어느 책에서 보니 수 천 년 전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출토된 파피루스에도 '요즘 젊은이 버릇없다'가 있다고 하더라. 예절, 예의 너무 강조하면 오히려 역효과 날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