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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ul 10. 2024

고마운 사람들

명단을 작성해 보니

저녁 노을이 내리는 시간에 홀로 벤치에 앉아 서녘 하늘을 배경삼어 부드럽게 흘러가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봅니다. 어느 새 내 나이가 이렇게 되었나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놀랍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던 젊은 시절도 떠올려 봅니다. 곁에는 사람들도 진짜 많았지요. 어느 순간 곁을 떠난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함께 물장구치고 놀던 고향 마을 친구들이 그립습니다. 물가 빨래터에 둘러 앉아 담소를 나누던 아지매들, 들일 마치고 소를 앞세우고 지게엔 풀을 가득 짊어진 채 귀가하던 아재들 모습도 생각납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가족처럼 가까웠지요. 모내기 시즌에는 마을 전체 집을 돌아가면서 저녁밥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품앗이가 한 달 가까이 이어지고 들에는 못줄을 쥔 남정네 둘에 모내기하는 아지매들이 몰려 허리를 내리며 모를 부지런히 심었습니다. 아이들은 못춤을 멀리 멀리 던졌지요. 아득한 추억 그 시절에 깊이 빠졌다가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 흘러가는 강물을 말없이 바라봅니다.


오가는 사람들도 없이 홀로 있는 벤치에 앉아 지난 삶 그리고 현재 인생 나아가 미래를 가만히 떠올려 봅니다. 지난 날은 대체로 행복하고 즐거웠습니다. 가난하고 힘든 시절도 분명 있었지만 그것들이 모두 추억이 되니 모두 좋은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가족을 위해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던 시절도 지금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배어 나오네요. 그저 옆도 안 보고 열심히 살았던 날들도 괜히 자랑스럽네요. 이젠 젊은 시절처럼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장담할 수 없으니 흘러가는 강물처럼 스쳐가는 인생 흐름에 맡기면서 넉넉하고 여유롭게 살아야 하겠지요. 어쩌면 이 순간의 모든 것도 훗날 좋은 추억이 될 터이지요.


갑자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삶에 감사한 사람을 한번 떠올려 보았습니다. 카톡에 생각나는 대로 대충 적어보니 아내와 우리집 아이들 3남매를 필두로 60여 명 명단이 나오네요. 제 자신에 솔직한 마음으로 적은 것이라 앞으로 추가될 사람은 아무래도 적을 듯합니다. 다시 그 명단 한 분 한 분 떠올려 봅니다. 내 삶에 어떤 것을 이 사람에게 감사할 것인가. 그리고 향후 언젠가는 감사 인사를, 감사 표시를 해야 할 터인데. 한번에 60여 명 명단이 나온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겠지요. 제 인생이 그렇게 외롭거나 힘든 것은 아니라는 증거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래도 퇴직 후에 만나 인연을 맺은 사람이 많네요.


이렇게 적어 놓고 보니 나도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감사한 존재일까. 다른 사람도 나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내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잘해 준 것이 별로 없는 듯하니 그 명단에 없을 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내와 우리집 3남매를 제외하고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은 역시 돌아가신 어머니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머니 살아 생전에 저랑 함께 했던 대화랑 농삿일에 5일장 다녀오던 날 제가 운전하는 경운기에 올라타 동네 아지매들 앞에서 부르셨던 '떠나가는 김삿갓', '엽전 열닷 냥' 노래도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당시 경운기에 올라탔던 아지매들의 단체 박수의 인트로 "따라라 따라라 따라라라 단단단 따단딴!"와 함께 어머니의 '떠나가는 김삿갓' 노래가 현풍장에서 고향 마을 달성군 논공면 위천 1동 우나리로 오는 비포장 도로에 울려 퍼지고 바로 옆엔 낙동강물이 저녁 노을에 실려 부드럽게 흘러가면서 물비늘들이 빛이 나고 있었지요.  


어떻게 생각하다 보니 어머니 생전에 함께 했던 일들이 감사한 일로 가장 먼저 떠오를까요. 참 신기합니다. 앵콜송으로 '엽전 열닷 냥'을 참으로 구성지게 부르셨던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 진정 감사한 일입니다. 그에 대한 보답을 제대로 못한 아쉬움이 가득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흘러가는 강물 앞에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겨 보는 것도 노년 세대의 여유로운 삶인 듯합니다. 좀더 세월이 흘러가고 노쇠하여 어딜 다닐 형편도 안 된다면 그때는 이렇게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기면 여유로움보다 청승에 가깝겠지요. 지금 제 곁에 있는 사람들이 영원히 함께 할 수 없겠지만, 같이 지내는 날들 속에선 깊이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지요.


따지고 보면 감사의 대상이 비단 사람에만 그칠까요. 내 의지대로 내 육신으로 어딘가로 가고 싚은 대로 갈 수 있고, 사고 싶은 것 사고,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지금 현재의 삶의 모두가 고마운 일이지요. 편안하게 잠들고 새벽 일찍 '아! 잘 잤다.'란 말이 절로 나오는 것도 실로 감사하기 그지없는 일이 아니던가요. 아파트 현관을 열고 나가 엘리베이터에 올라 같은 라인, 같은 동에 사시는 이웃 사람들과 미소 가득한 얼굴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것도 얼마나 고맙습니까. 아파트 주차장에서 만난 고양이들도 반갑고 고마운 존재입니다. 그러고 보니 세상사 모든 만물이 고마운 것 같습니다. 하늘과 바다 그리고 주위의 산들도 나무들도 내 삶에 기쁨을 가져다 주니 그 또한 진실로 감사한 대상이겠지요.


오늘 갑자기 감사한 사람들 명단을 작성하다 보니 우주 만물까지 떠올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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