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에 서리가 물들고
겨울 분위기가 물씬 풍기면
내 어린 시절
추억이 가득 서린 그 길에 선다
어릴 때
그때는 얼마나 추웠는지
X자로 동여맨 책보자기
그래도 좀 산다는 집 아이들은
가방을 몇이 들고 다녔지
난 국민학교 졸업할 때까지
책보자기에
검정고무신
우린 책보자기에 책을 가득 쌓고 그 위에
도시락을
김치가 가득 들었던
엄마의 정성과 염려와 기대 그리고 소원이
함께
모여 들었던
책보자기를 단단히 매고
겨울 찬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집을 나와 동구밖으로
다시 비포장 신작로를 고개를 숙이며 달리다
혹시나 저 앞에서 차가 올까 봐
어쩌다 고개를 들었다가
잠깐 그렇게 들다
속히
고개를 다시 깊이 숙이고
바람을 맞지 않으려 애쓰면서
뛰고 또 뛰고 그렇게 산고갤 올라 서면
저멀리 면소재지가 아득하게 보이고
산고개가 딱 절반 코스인데
우리 마을은 유난히 학교에서 멀었다.
여기 고개에 올라서니
우리 국민학교가 보이는데
보이긴 하는데
고개 위의 겨울바람은
엄청나게 드세고
차라리 여기에서 집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햇볕 따뜻한 저쯤에 숨었다가 아이들 돌아올 때
시간 맞춰 나와 집에 가면
부모님 모를 거라고
마을 아이들이 몇이서 작당하고
나를 그 무리에 넣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난 도저히 그것은 못하겠다.
오직 나 하나만 보고
사시는 우리 엄마 얼굴 생각하니
학교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하고 잘 지내다 오라는 엄마의 그 말이
가슴에 뱅뱅 머릿속에도 뱅뱅
난 엄마에게 학교 잘 다녀오겠노라고
큰소리로 약속했고
안방에서 한번 차가운 마루에서 또 한번 그래도 못 미더운지 마당에서 대문 근처 그렇게
세 번이나 엄마가 안아 주셨다.
헤진 광목 앞치마에 둘둘 말린 채 엄마의 품이
지금도 아련하게 떠오르는데
엄마는 정말 많이 안아주셨지.
아마도 우리 마을 아이들 즈그 엄마가 안아준 것 다 합쳐도
우리 엄마 안아준 것보다 적었을 거야
날 깊이 안으셨다가 내 볼을 두 손을 가득 잡고
한참이나 날 쳐다보시고
난 학교 시간 급하다고 재촉하고
그렇게 엄마와 난 눈이 정말 많이 마주쳤다
지금 간 세월 아득한 그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 인생 특별히 고생도 없었던 것은
어머니께서 살아 생전 그때
나에게
사정없이 폭포수처럼
쏟아 부었던
그 사랑 덕분일러니
엄마의 손은 고생으로 소나무기둥껍질과 같았고
한번도 '공부하라'는 말씀 없으셨지만
내 의무는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가장 큰 의무는
우리 엄마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게
학교 가서 선생님께 잘 배우고
월례고사 우등상 받아오는 것이었다.
흰 광목 너른 색깔이 온갖 흔적이 촘촘하게 그림그리고
앞치마에 온갖 물자국, 김칫국 자국, 땟자국 등등이 떠오르고
그 어쩌면 냄새 가득한 광목 앞치마가
엄마의 인생 그 자체였다.
엄마의 두 손은 색이 바래고 다시 여러 색이 혼합된
광목 앞치마에서 머물렀다.
그날도 우리 마을에서 몇 명은 산고개길에 머무르고
우리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길가에서 함께 어울려 집에 오면
그집 아지매들이 우리집에 몰려와서 자기 아들 학교 갔는지 안 갔는지 물으면
나도 마음에 없는 거짓말을 하였더라.
마을에 들어서니 낯익은 얼굴은 몇 안 남았고
인제는 고향이 타향이 되어가고
어린 시절 놀았던 뒷동산에
민둥산에 모여 닭싸움, 기마전, 비사치기, 씨름 놀이하던 민둥산 무덤들이
울창한 숲이 되어
사람의 숨결 거부한 지 한참 세월이 되었다.
민둥산에 다같이 놀다
남의 묏등에 한꺼번에 누워 흘러가는 흰구름 보던 날
그 무덤 주인은 아무 죄도 없이 우리가 깔고 누웠지.
어떤 날은 독수리 세이코 녹음기를 묏등 위에 얹어놓고
Keep on running 막춤을 정신없이 흔들어 대었던 날
그 무덤 속 그 어른은 얼마나 정신이 상그러웠을까.
그래도 내 얼굴 기억하는 마을 형님들 형수님들과 마을회관에 둘러 앉아
추억 이야기 한참 나누는 흥겨운 분위기였다가
먼저 가신 어른들 이야기에 분위기도 숙연해지고
다시 즐거운 이야기하면 금새 잊고 같이 웃고
자기들 살아 있을 때 한번이라도 자주 오라고
앞으로 살 날이 얼마나 남았겠느냐며
내가 그들의 손마다 잡고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오는데
나도 울컥, 마을 사람들도 내 얼굴 아는 겨우 몇 사람이
옛날 추억에서 나오는 일이 너무나 힘들었다.
젊은 시절 그렇게 장대하던 아재 한 사람은
나를 보자마자 손을 콱 잡더니
잘 있었는교? 우째 인자 왔는교? 집에 식구들은 다 핀한교? 내가 한번은 가본다 카는 기 이래 됐뿐네. 아지매도 잘 있지요?
이 아재는 나보다 나이가 한참 위다. 예전에는 나를 보고 "자네 잘 지냈나. 집에 아~들 하고 아~들 어마이는 잘 지내고 있제. 아파트도 하나 장만했제."라고 인사하셨지.
지금은
나를 앉혀 놓고 갑자기 말을 높이고
내가 할 말을 잃었지.
함께 걸었던
마을 형님 한 분이
그 아재 뒤에서 나만 보이게
무슨 손짓을 한다.
아재가 다시 내게 묻는다.
잘 있었는교? 우째 인자 왔는교? 집에 식구들은 다 핀한교
같은 말을 세 번이나 하는 것을 보고 마을 형님의 손짓 의미를 알았다.
어디 아재는 세월만 잃었겠나.
추운 날에도
신발은 짝이 맞지 않았고
내 바지 주머니에 손을 죽 넣더니
돈을 달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