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너그라트 전망대 1 - 한국인이 아닌 척하기!
오늘은 아침부터 해가 쨍했다. 일어나자마자 커튼을 열어젖혔다. 아, 황금빛 마터호른! 그리고 파란 하늘! 이 기억만으로도 10년은 즐거울 듯하다.
서둘러 씻고 아침을 먹었다. 햇반에 김, 계란 프라이 그리고 장조림! 흡족한 식사 후,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쌌다. 겁나는 스위스 물가는 마트에서 파는 샌드위치도 못 사게 해서 어제 재료를 사두었다. 콩알이와 난 새가슴이었다. 샌드위치에 물, 선글라스를 챙겨 산악열차를 타러 갔다. 오늘은 고르너그라트 전망대를 갈 거다.
케이블카가 아닌 열차로 가는 거라 얼마나 마음이 편했는지 모른다. 전선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가는 케이블카는 언제나 무섭다.
산악열차는 45도 이상의 경사진 터널을 지나 산기슭을 오르기 시작했다. 온통 녹색의 산자락을 지나자 멀리 하얀 눈 덮인 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터호른뿐 아니라 모든 봉우리들이 그저 탄성만 나오게 했다. 시선을 어디에 돌려도 아름다웠다. 높이 올라갈수록 마을의 집들은 동화 속의 집처럼 보였다. 그림 같다는 말이 실감 났다. 알프스는 4계절을 모두 뿜어내고 있었다.
전망대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아쉽게 했다. 더 천천히, 더 오래 눈에 담고 싶은 풍경이었는데!
열차에서 내려 일부러 눈 위로 걸었다. 콩알이가 초딩이냐며 놀렸다. 눈 오는 날의 강아지처럼 달떴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전망대 안도 둘러보고 기념품 가게도 둘러봤다. 하지만 바깥만큼 매력적이지 않았다. 우린 금방 밖으로 나와 사람들이 간간이 서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 또다시 알프스에 감탄하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위를 보니 거기서 점심을 먹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주섬주섬 점심거리를 꺼냈다. 알프스를 바라보며 샌드위치를 먹으니 미슐랭이 부럽지 않다.
곳곳에서 사진도 찍고 산멍도 즐기다 보니 내려갈 시간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산악열차 정류장에 있는 매점에 들러 기념품도 사고 신라면도 받아 가방에 넣었다. 매점을 나오자 10여 명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벤치에 모여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그런데 익숙한 젓갈 냄새가 풍겼다. 뒤이어 한국말도 들렸다. 이럴 수가! 벤치에는 햇반과 각종 김치, 밑반찬들이 깔렸고 큰소리로 일행을 부르며 먹기를 권하고 있었다!
콩알이와 난 눈짓으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 무리와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질 때까지 우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행여나 콩알이가 태극기 키링을 단 가방을 들고 오진 않았는지 쳐다봤다. 아,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