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마트는 이번 여행의 최종 목표였다. 예전에 ‘꽃보다 할배’를 보며 언젠가 반드시 가리라 했던 곳이다. 여행했던 몇몇 나라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나라가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이었다. 공교롭게도 게르만족의 나라들이라 내 안에 게르만의 피가 흐르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민족 문제가 아니라 모두 알프스를 끼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산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정확하게 여행을 다녀온 지 1년이 된 지금, 제네바 역에서 어떻게 기차를 탔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VISP 역에서 체르마트로 가는 구간만은 너무나 생생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렇게 느린 기차가 다니나 싶었지만 굽이굽이 산을 올라가려면 당연한 속도였다. 커다란 창문 가득 담긴 알프스 자락은 장관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한국의 속도전에서 느꼈던 피로감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초록 산기슭에 자유롭게 흩어져 풀을 뜯어먹는 양과 염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풍랑 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체르마트 역에 도착할 때까지 콩알이와 나는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고 콩알이는 카메라에서 한시도 손을 떼지 못했다. 그 풍경들을 눈과 가슴에 새기지 않고 사진을 찍어 대는 모습이 영 아쉬웠다. 하지만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순간부터 나는 그 사진과 영상들을 보고 또 보고 있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마테호른을 볼 수 있다더니 우리가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비가 내렸다. 화창한 날씨를 기대했기에 좀 실망스러웠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고 말았다. 숙소까지 약 5분 남짓 걸었는데 마치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금방이라도 하이디가 툭 튀어나올 것 같았다. 숙소까지 입을 헤 벌리고 갔을지도 모르겠다.
숙소는 이번 여행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스튜디오였지만 테이블 세트와 킹 사이즈의 침대, 옷장, 각종 조리도구가 준비된 주방 그리고 방 크기의 반만 한 욕실까지 완벽했다. 하지만 숙소를 더 빛나게 해 준 건 창밖으로 보이는 마테호른이었다. 커튼을 열기만 하면 하얀 마테호른을 내내 볼 수 있었다. 때때로 구름이 정상을 가리기도 했지만 3대가 덕을 쌓았는지(?) 우리는 도착한 날부터 떠나는 날까지 내내 마테호른을 볼 수 있었다.
콩알이와 난 한껏 달뜬 마음으로 가볍게 짐을 풀고 숙소를 나왔다. 마침 비도 멎었다. 중심가까지 5분이면 충분했다. 이렇게 작은 마을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태생이 도시녀인 나보고 여기서 살겠냐고 누가 묻는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Yes라고 대답할 만큼 난 이 마을에 푹 빠져 버렸다. 단 한 가지, 살인적인 물가가 좀 걸리긴 하지만 말이다. coop에 들러 간단한 식사거리를 사들고 나오는데 콩알이가 말했다.
“엄마, 마트 물가가 이 정도면 한국보다 싼 거 아냐?”
그랬다. 숙소만 잘 구하면 여기서 한 달 살기도 가능할 것 같았다. 숙소로 들어오는 내내 얼마를 모으면 한 달 살기가 가능할지 셈하기에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