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닐라라떼

연결감

by 이호준

"이 대리. 오늘도 바닐라라떼지?"

"팀장님. 아직도 물어보세요? 이 대리는 그냥 바닐라라떼 그 자체에요. 피에 바닐라라떼가 흐른다니까요?"


작년부터였을까. 경기가 좋아진 게 체감이 되더니 회사 매출이 급격하게 올랐는지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항상 팀장님이 팀원들의 커피를 사기 시작했다. 장팀장님은 월급이 아무리 올라도 커피를 사실 분은 절대 아니기 때문에 대충 이사급에서 법인 카드를 쓰라고 했겠거니 하고 좋게 좋게 얻어먹고 있다. 팀장님이 커피를 사기 시작한 이래로 평일 5일 근무일 중 약 4일을 카페에 갔었고 회사를 다녔던 3년 간 변함없이 바닐라라떼를 꾸준하게 주문해 왔으니 김대리가 저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자, 이대리. 바닐라라떼 자네 거야. 자넨 정말 바닐라라떼를 좋아하나 보구만. 순애보가 따로 없어."

"감사합니다. 팀장님. 제가 그런가요? 하하."


내가 바닐라라떼를 그렇게 좋아했던가. 그저 카페에 가면 바닐라라떼, 정확히는 대학교 1학년 그 시절에 마셨던 달큰한 바닐라 향이 코를 간지럽혀 주문하게 될 뿐인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처음 발을 디디면 낯선 것들이 참 많다. 등교를 같은 교실로 하지 않는다는 것. 정해진 반이 없어 누구와 친해져야 하는지, 어떻게 친해져야 하는지 고민되는 것. 겪어보지 못했던 술냄새. 공부를 하지 않아도 혼내는 선생님이 없다는 것. 그리고 커피가 그렇다. 고등학생 땐, 물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까지는 아니었지만, 밤에 공부를 하더라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공부했던 것 같다. 낮에 졸리면 낮잠을 잤던가, 공 차러 나갔던가. 대학생이 되고 나선 점심을 먹고 카페, 저녁을 먹어도 카페, 밤에 만나도 카페, 술을 먹어도 마지막엔 카페다. 말 그대로 카페인에 절여지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첫 학기를 시작하고 대학생 친구들이 생겨 이전엔 경험해 보지 못했던, 여학생들이나 가는 줄 알았던 그런 장소에 가서 음료를 주문해 보려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메뉴판에 적힌 수많은 메뉴들은 다 무엇일까?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대학교 친구들에게 물어보자니 나만 모르는 것 같아 창피하고, 남중남고를 나온 평범한 남학생으로써 여자 아르바이트생에게 물어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최후의 방법으로 옆에 있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주문하는 것을 옆에서 눈여겨보면서 내심 주문한 메뉴가 나온 걸 보고 마지막에 주문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내가 주문할 차례가 되었다. 이렇게 된 거 아무거나 대충 주문하려고 입을 떼는 찰나, 카페 문을 급하게 열고 들어온 그녀가 급하게 내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한데, 먼저 주문해도 될까? 다음 강의까지 시간이 얼마 없어서 그래. 부탁할게."

"당연하지. 먼저 주문해. 우리 다 기다려도 돼. 공강이거든."


볶은 커피콩향으로 가득했던 카페였는데 순간 살짝 덜 마른빨래의 눅눅한 냄새, 그리고 그 아래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장미향이 코를 자극했다. 나는 한 여름밤 디퓨져가 놓인 방에서 에어컨 곰팡이 냄새를 맡는듯한 어딘가 요염한 산뜻함에 취해 동의하지도 않은 친구들까지 대변하고야 말았다. 물론 충실하게 남중남고를 나온 친구들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동의했다.


"아이스 바닐라라떼 한 잔 빠르게 부탁드릴게요"

"3,500원입니다. 카드로 하시나요?"


아이스는 차가운 음료라는 의미이고, 바닐라는 뭐지? 바나나인가. 라떼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인데 아이스크림 중에 카페오레가 그나마 비슷한 뉘앙스네 와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다음 분, 주문 도와드릴게요. 어떤 메뉴로 주문하시겠어요?"


나는 차마 여자 아르바이트생을 쳐다보지 못해 고개를 숙인 상태로 빠르게 주문했고, 고민하지 않았다.


"아이스 바닐라라떼 한 잔 주문할게요."


내가 주문한 첫 커피는 그렇게 바닐라라떼로 결정되었다. 초조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보며 시간을 확인하고 있던 그녀가 금방 준비된 바닐라라떼를 받고 말했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점심 먹고 수업은 커피 없인 너무 힘들어. 너도 바닐라라떼 좋아하는구나? 괜히 반갑네. 안녕!"


내가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못하는 와중에 그녀는 급하게 카페를 떠났다. 뭔지도 모르는 걸 어떻게 좋아한단 말인가. 처음 만난 바닐라라떼는 썼다. 커피는 원래 쓰고, 라떼는 커피에 우유를 타서 부드럽게 먹을 수 있는 커피음료고, 바닐라는 특정 향을 가진 첨가제 겸 시럽이다. 따라서 바닐라라떼는 쓴 맛이 가장 약한 커피음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생전 처음 자발적으로 주문한 바닐라라떼는 달달하고 부드럽지만 분명 썼다. 학년이 올라가고 밤샘도 하며 대학생활 중에 참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마셨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에스프레소에 물만 탄 아메리카노도 그다지 쓰게 느껴지지 않게 되었고 하루에 커피 한 잔은 거의 필수로 챙기게 되었다. 그럼에도 왜인지 모르게 하루 첫 커피는 항상 바닐라라떼로 시작했다.


그날도 언제나처럼 카페에 들어가는데 익숙한 커피 볶는 향이 아닌 낯익은 꿉꿉한 장미향이 코를 자극했다.


"안녕하세요. 무엇으로 주문하시겠어요?"


고개를 들어 눈에 들어오기 전에도 이미 눈앞에 찰랑이는 긴 생머리와 한쪽 귀에만 차고 있던 별모양 귀걸이가 그려졌다.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지만 뭐 어떠한가. 이제 여자 아르바이트생에게도 말할 수 있는 평범한 대학생이 되었음이다.


"아이스 바닐라라떼 한 잔으로 주문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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