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어 Feb 13. 2022

가만있어!

폭설


몇 년 만에 큰 눈이었다. 한때 제설의 전문가로 정평이 난 지역이었지만 근 4년이라는 시간은 제설 관련 예산을 과감히 삭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했었나 보다. 시청은 전혀 제설 준비가 돼 있지 않았고 시민과 관광객들은 도로에 몇 시간씩 갇혀 있어야만 했다.      


도시로 들어서는 초입의 큰 항구 옆으로 첫 번째 맞는 고갯길이 있는데 경사가 그리 크지 않지만, 과거에도 갑작스러운 폭설에는 미끄러진 차들로 길이 막히곤 했던 곳이다. 이번 눈에는 시청이 전혀 준비돼 있지 않았던 터라 국도유지관리사무소에서 책임지는 국도 구간을 벗어나 도시로 들어서는 차들이 그곳에서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앞선 차들이 미끄러져 꼼짝도 못 하고 있다는 112 신고가 폭주했다. 건너편 길가에 순찰차를 세워두고 첫 번째 미끄러진 차로 다가갔다. 보통 승용차는 전륜구동이라 웬만큼 눈길에서도 어지간하면 밀고 올라가는데 외국산 승용차들은 한결같이 후륜구동이라 꽁무니만 좌우로 흔들 뿐 올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하나씩 힘으로 밀어 올려보기로 했다. 파트너와 둘이 힘껏 미끄러진 벤츠를 밀어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리 밀리고 다시 저리 밀릴 뿐이었다. 무엇보다 운전자가 액셀을 너무 게 밟는 게 문제였다. 눈길에서 차가 미끄러질 때는 최대한 천천히 액셀을 밟는 게 요령인데 당황한 운전자는 연신 굉음이 날 정도로 액셀을 밟고 있었다. 그냥 민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 운전자와 실시간 소통하며 차를 밀어야겠다는 생각에 운전석 쪽 뒷자리 유리문을 두들겼다.     


“창문 좀 열어보세요!”     


검은 유리문이 스르륵 내려가고 안을 들여다봤을 때 어이가 없었다. 조수석의 여성은 그렇다 치더라도 뒷좌석에 성인 남성 두 명이 버티고 앉아 있었다. 외국산 차라 원래 차제가 무거운 거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남자들이라도 내려서 같이 밀어요!”     


약간의 짜증이 섞였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짜증을 낼 순 없었다. 하지만, 잠시 후 차에서 내린 남자 중 한 명을 보고 한 번 더 기가 막혔다. 키는 180이 충분히 넘고 너무 건장해 위협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저렇게 건장한 놈이 내가 뒤에서 그렇게 차를 밀며 애쓰고 있는 동안 그저 차 안에 아기처럼 앉아만 있었다고 생각하니 순간 자괴감마저 밀려왔다. 어쨌든 승객인 남성 두 명과 경찰 두 명이 운전자만 태운 채 힘을 합쳐 차를 밀자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체하는 사이 벌써 눈은 제법 쌓였고 벤츠의 꽁무니는 연신 흔들리며 구둣발은 계속 미끄러져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벤츠를 밀어 올렸다.  

   

 뒤로 밀려 있는 차량의 행렬이 끝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벤츠가 떠나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는지는 기억나지도 않는다. 다만 밀어 올린 차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쉴 때 승객들은 재빨리 차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도망치듯 떠난 뒷모습만 떠오른다.      


 그다음은 옆 차선의 국산 SUV 차였다. 꽁무니를 흔드는 벤츠를 피하려다 오른쪽 차선 밖으로 밀려났는데, 미끄러져 혼자 힘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엔 처음부터 창문을 두들겼다. 역시 운전자 포함 남성 두 명이 있었다. 조수석에 있던 여성이 운전대를 잡을 것을 권하고 남성 두 명과 함께 차선으로 차를 밀어 올리기 위해 애썼지만, 차체가 워낙 무거워 쉽지 않았다. 그때 왼쪽으로 누군가 한 명 더 다가와 함께 차를 밀기 시작했다. 워낙 집중해서 힘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말할 겨를이 없었지만, 그 사람은 피부가 까무잡잡한 외국인이었고 그 차의 승객이 아닌 게 확실했다. 힘을 쓰며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씩 웃어 보이는 미소가 반가울 뿐이었다. 어렵게 SUV를 본선으로 밀어 올린 후 그 외국인이 어눌한 말투로 말했다.     


“앞차가 가야 나도 갈 수 있잖아요”     


마치 자기가 도운 이유를 말하는 것 같았지만 묻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이 당연한 상황이었다. 2차선 고갯길의 초입에서 차 두 대가 미끄러져 길을 막아서고 있는 상황에서 그 뒤로 백 미터도 넘도록 차량이 밀리고 있었다. 너무 뒤에 서 있는 차들은 영문도 모르고 길가에 고립돼 있었지만 적어도 선두 차량으로부터 서너 대는 그날 정체의 원인을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었다. 도움을 주던 외국인이 자신의 차로 돌아갔고 몇 번의 미끄러짐 후 어렵게 올라갔지만, 그 뒤에도 여러 대의 차들이 미끄러져 올라가지 못했다. 그때마다 창문을 두들겨 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려서 함께 밀 것을 부탁(?) 해야 했고 도저히 힘에 부치면 운전대만 잡고 멀뚱멀뚱 보고 있는 뒷 차 사람들에게 소리 질러야 했다.     


“내려서 함께 밀어주셔야 해요. 그래야 모두 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앞차가 언덕을 올라가야 자신들도 갈 수 있음을 눈으로 보고 알 수 있었지만, 경찰이 말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런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일단 경찰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번개같이 내려 힘을 보탰다. 그들도 눈에 미끄러지고 자기 자동차가 아닌 바퀴가 헛돌며 튀기는 눈에 옷을 버려가며 애써야 했지만, 누구도 불만을 표시하거나 거절하는 경우는 없었다. 다만 그렇게 한 대를 보내면 다시 뒤차를 향해 다시 소리 질러 말해야 함은 변함없었다.      


 마치 어쩔 줄 몰라,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어린아이들 같았다. 신기한 건 마치 선생님처럼 호통을 쳐도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은 없었고 하나같이 말 잘 듣는 모범생처럼 잘 따랐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제일 처음 벤츠에서 내렸던 건장남도 막상 차에서 내릴 때는 허둥지둥 내리며 차 안에 앉아만 있었음을 미안해했고 함께 차를 밀어 올릴 때는 뒤늦게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수많은 차들을 오로지 사람의 힘으로 밀어 올렸고 후륜 차들은 돌려보내야 했다. 어떻게 그 상황이 마무리됐는지 지금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혼돈의 밤이었다.    

 

비번 날 한숨 자고 일어났을 때는 온 도시가 난리였다. 제설 준비가 되지 않은 시청에서는 큰 도로 제설만 겨우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밤새 단단하게 굳은 눈으로 인해 애를 먹고 있었고 아파트와 주택 구간의 도로는 쌓인 눈이 그대로였다. 역시 살짝 경사만 있으며 승용차들은 헛바퀴 돌기 일쑤였고 특히 외국산 승용차는 틀림없이 미끄러졌다.      


성탄절을 맞아 방문했던 처남 가족이 귀경을 서둘렀고 그들이 큰 도로까지 나가는 길이 이상 없는지 미리 나가 살펴봐야 했다. 곧 처남의 차가 지하 주차장에서 나와야 하는데 승용차 하나가 아파트 접근로에 미끄러졌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운전자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했다. 어쩔 수 없이 나라도 혼자 뒤에서 밀어봤다. 역시 역부족이었다. 행인들은 바라만 볼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그때 중학생 무리가 지나갔고 어쩔 수 없이 함께 밀자며 도움을 청했다. 녀석들은 기다렸다는 듯 눈밭을 뛰어와 트렁크에 달라붙었다. 마치 선생님의 지시라도 기다렸다는 듯 재미있어했다. 중학생 세 명과 성인 남자 한 명의 힘으로도 차는 좀처럼 나가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한 명의 성인이 트렁크 오른쪽에 달라붙었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차를 밀어 올려 곧 나올 처남의 차가 진행할 도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안심하며 돌아봤을 때 그 성인 남성이 외국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운전자 대신 고맙다는 눈인사를 하는 나를 향해 미소를 짓는 그는 20대 초반의 동남아 사람으로 보였는데, 어젯밤 고갯길에서 자발적으로 경찰을 도왔던 남자의 미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 뒤 며칠 동안 그날의 상황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 일이 지워지지 않는 건 뭔가 풀리지 않는 의문, 아니 의문까지는 아니어도 다소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경찰이 자신의 차를 밀어 올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동안 차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다가 경찰이 내려서 좀 같이 밀자고 말하면 그때 서야 합류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막상 차에서 내릴 때는 앉아만 있었던 태도를 한결같이 겸연쩍어했고 경찰의 요구에 불만을 표시하거나 거절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경찰의 도움만 받겠다는 약삭빠른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앞차를 밀어내기 위해 눈에 미끄러지며 고투를 겪는 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하던 뒤차의 운전자들도 내려서 함께 밀어야 한다는 경찰의 요청에는 군말 없이 신속하게 따라줬다. 하지만 누구도 자발적으로 앞차를 미는 작업에 동참하지는 않았다.


마치 누군가의 지시가 없으면 절대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 같았다. 동남아시아 사람으로 보이던 그 외국인 말고는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20년 차와 1년 차 경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