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즉시공( 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휴대폰 습득 신고가 접수됐다. 대로변에 있는 우리 지구대에서 아주 흔한 신고다. 다행히 암호화 잠금이 걸려 있지 않았고 저장된 연락처를 볼 수 있었다. 일단 가족이나 연인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을 추정할 수 있는 연락처를 발견하면 일이 쉽다. 그 번호로 전화를 걸면 전화를 받는 사람은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받을 것이고 지구대임을 밝히면 어떡하든 휴대폰 주인에게 연락해줄 것이다. 그리고 곧 분실자는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지구대로 달려올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겪는 일이기 때문에 전혀 어렵지 않은 업무다.
우선 연락처 중 제일 위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시도했다. 그런데‘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다음 가까운 것으로 추정되는, 그 아래의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발신이 불가능하다. 번호를 확인하니 016으로 시작한다.
지금은 발신이 불가능한, 적어도 10년 전쯤 사용이 중단된 번호다. 그러니까 ‘아빠’의 번호는 적어도 10년 이상 업데이트되지 않은 것이다.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아래에 다른 번호가 눈에 띈다.
“하나뿐인 작은 아빠”
아빠의 번호는 적어도 10년 전에 멈춰 선 반면에 작은 아빠는‘하나뿐인’이란 수식이 붙어 있다. 누군가의 휴대폰에 글자로 저장된 방식일 뿐인데 이상하게 서운했다. 마치 그 휴대폰 속 아빠라도 된 것처럼 소외감이 느껴졌다. 순간 이상한 방향으로 상상력이 번졌다.
휴대폰의 분실자와 가까울 것으로 예상되는 1번과 2번이 연락되지 않는다면 3번에게 시도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인데 왠지 망설여졌다. ‘작은 아빠’라는 단어에도 불구하고 분실자와의 관계에 왠지 혈연관계가 없을 것 같은 불안이 밀려왔다.
잠깐 망설이며 1년 차 후배에게‘아빠’의 번호는 10년 이상 업데이트되지 않은 반면에 ‘작은 아빠’의 번호는 과한 애정이 담긴 방식으로 저장된 이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지를 물었다. 질문의 형식이었지만 궁금한 건 아니었고 약간의 오만 또는 과시가 웅크리고 있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게 아닐까요?”
반사적으로 나온 후배의 대답에 대꾸하지 않았지만, 내심 그건 아닐 거야 싶은 생각으로 웃었다. 1년 차 경력의 후배는 아직 경험이 부족해 너무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보지만, 지난 20년의 경험을 생각하면 세상은 그렇게 순수하지 않았다. 세상은 얼마든지 사악하고 이기적인 사람들로 넘쳐 났으며 업무 중 그런 이들을 자주 만나면서 충분히 단련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작은 아빠는 혈연관계의 작은 아빠가 아닌 거 같은데?”
내면의 불손한 상상으로 주저하고 있을 때 후배는 관심 없다는 듯 글쎄요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머지 번호들은 혈연관계를 추정할 수 없으므로 잠시 후 어쩔 수 없이 그 ‘작은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야만 했다. 전화를 받은 남자가 대답했다.
“제 조카입니다.”
다른 도시에 거주한다는 남자는 우리 지구대 관할에 조카가 거주한다고 말함으로써 분실자와 혈연관계가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그리고 조카나 조카의 어머니에게 연락해 휴대폰을 찾아가도록 하겠다고 했다. 30분 후쯤 잃어버린 휴대폰 주인의 ‘엄마’가 지구대를 방문해 딸의 휴대폰을 찾아갔다.
부끄러웠다. 물론 아무도 그 부끄러움을 눈치채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분실자의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고 ‘하나뿐인 작은 아빠’에게 전화를 걸기까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 작은 아빠는 분실자와 혈연관계가 없는, 그러니까 ‘엄마’의 다른 남자일 수 있다는 의심을 했다. 그래서 016으로 시작하는 ‘아빠’가 안쓰러워 보였다. 결론적으로 엉뚱한 상상이었고 그건 ‘엉뚱’이 아니라 오염이란 생각이 들었다.
20년 동안 수많은 경험이 있었다. 세상에는 좋은 일이 있는 만큼 필연적으로 나쁜 일도 많다. 어떤 직업은 좋은 일보단 주로 나쁜 일을 다루게 된다.
4세기경 불교 경전을 중국에 전한 푸른 눈의 승려, 쿠마라집은 전쟁포로로 20년 넘게 중국에 억류되었던 동안 승려로서 모욕은 물론 열반의 꿈이 좌절되는 고초를 겪었다. 덕분에 중국어를 완벽하게 체득했고 경전을 번역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유가 박탈된 자신의 한계에서‘색즉시공( 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으로 잘 알려진 반야심경의 중국어 번역본을 전함으로써 동아시아 선불교 반야사상의 정수가 되도록 했다고 한다.
쿠마라집의 공(空)하다는 번역은 어쩌면 자신의 현실을 뛰어넘고자 했던 몸부림이었는지 모른다는 평가가 있다. 도대체 현실이 공(空) 하지 않다면 촉망받던 엘리트 승려의 좌절된 인생은 도저히 구원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번역, 공(空)은 2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동아시아 불교도들에게 여전히 살아 있는 등불로 빛나고 있다.
진흙탕 속에서도 연꽃을 피우기 마련이고 오염은 비겁한 변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