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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다 May 10. 2022

5년 만에 다시 찾은 제주는

    나에게 제주란 학생 때는 수학여행 가는 장소, 성인이 되고 나서는 해외여행은 못 가지만 숨은 쉬고 싶을 때 탈출하는 도피처 같은 곳이었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제주에 가면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 보는 설렘을 맛봤고, 인생이 무료해 어쩔 줄 몰랐던 대학교 여름방학 때는 정처 없이 올레길을 걸었으며, 답도 없는 야근 지옥에 미칠 것 같았던 이십대 아홉수의 마지막 날에는 눈길을 헤치고 백록담 꼭대기에 올랐다. 이래 저래 합치면 평생 동안 제주에 이래 저래 이미 일곱번 정도 가봤는데, 여길 신혼여행으로 또 가게 될 줄이야.. 그치만 신혼여행으로 찾은 제주는 색다른 느낌이었다.

이번엔 꼭 보고 싶었던 가파도의 봄 풍경

    늘 한여름 아니면 한겨울에만 제주를 가봤던 탓에 여덟번째 와보고 나서야 비로소 늦봄과 초여름 사이의 싱그러운 제주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이 시기에 가장 예쁘다던 가파도의 청보리밭을 꼭 보고 싶어서 미리 배 티켓도 예매해놨었는데, 그날 아침에 엄청나게 비가 왔다. 취소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서 일단 가보니 배 타자마자 날씨가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막상 도착하니 해가 쨍쨍 떠서 마라도와 성산일출봉까지 보이는 예쁜 경치를 보게 되어 정말 운이 좋았다.

운전하느라 긴장한 거 아님. 아무튼 아님...

    지금까지는 뚜벅이로 제주를 누볐지만 수트케이스 세 개와 두 개의 배낭을 짊어 메고 대중교통으로 여행할 수는 없었기에 이번엔 렌터카를 빌리기로 했다. 영국인 남편이 한국에서 운전하게 만들려면 너무 복잡한 프로세스를 거쳐야 했기에 내가 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2년 장롱면허 탈출을 위해 한국에 가기 전 영국에서 미리 운전연수를 12시간이나 받았다. 영국에서 수동차로 단련했으니 오토차 운전은 쉬울 줄 알았지.. 영국의 도로 사정과 완전 다른 한국에서 운전하는 건 또 다른 차원의 어려움이었다. 제주에서의 운전은 누가 쉽다고 했나..? 정속보다도 빠르게 운전 중임에도 클락션을 울려대는 제주도민 차들과 시시때때로 목숨이 아홉개인가 싶게 미친 짓을 하는 하허호 달린 렌터카들 때문에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그래도 10일 동안 열심히 운전하고 제주 한 바퀴를 다 돌고 나니 이제 한국에서의 운전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운전하다 무작정 멈췄던 어딘가

    뚜벅이로 여행할 땐 버스시간을 맞추느라 쫓기듯 여행했지만 렌터카 덕분에 마음 가는 대로 아무 데나 내비게이션에 찍고 드라이브하다가 예쁜 풍경이 나타나면 그대로 차를 멈췄다. 일정표의 체크리스트를 지우는 여행이 아니라 지도 위에 그림을 그리듯 여행할 수 있어 좋았다. 게다가 렌터카 덕분에 뚜벅이로는 차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중산간 지역을 자유롭게 여행했다는 게 색다른 경험이었다. 넘쳐나는 해외여행 수요를 오롯이 감당하고 있는 주말의 제주에서 북적이는 인파를 피하려면 산속으로 숨어드는 수밖에 없었는데, 대중교통으로는 차마 갈 수 없던 사려니숲길, 곶자왈 같은 숲들과 곳곳에 숨겨진 독립서점과 카페를 찾아내며 시간을 보냈다.

네비에 보이길래 무작정 찾아갔던 책방 소리소문. 우연히 좋은 서점을 찾아내서 정말 기뻤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을 꼽으라면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예쁜 에어비앤비에 묵었던 날들이었다. 한국어를 하나도 못하는 남편의 보호자로서 여행을 하다 보니 사실 제주에서의 시간이 나에게는 오롯이 휴식시간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에어비앤비의 조용한 정원에서 산책 중인 고양이들을 쓰다듬기도 하고 해먹에서 책을 읽다가 까무룩 낮잠을 자는 시간이야말로 진짜 휴식의 시간이었다. 에어비앤비와 겸해 운영 중이신 식당에서 먹었던 핫스톤 스테이크도 정말 훌륭했고, 마지막  차려주신 건강한 조식 덕분에 든든하게 여행을 이어갈  있었다.

제주에 간다면 또다시 이 에어비앤비에 묵고 싶다.

    제주 여행을 마무리하면서는 제주 현대미술관 근처의 갤러리에서 그림을 샀다. 사실 남편이 자몽주스 먹고 싶다 해서 갤러리에 붙어있던 카페에 들렀는데, 음료를 기다리면서 갤러리를 둘러보니 그림들이 너무 예쁜 것이었다..? 결국 신혼여행을 기념하는 의미라며 그 자리에서 충동구매해서 런던까지 이고 지고 돌아왔다 ㅋㅋㅋ 사실 시아버님께서 비행기표를 비즈니스 클래스로 업그레이드해주신 덕에 용기를 냈지, 아니었음 들고 올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들고 올 땐 힘들었지만 볼 때마다 뿌듯함

    아무튼 제주도에서의 꿈같았던 시간은 우리 집 복도 벽의 그림으로 남았고, 슬슬 이제는 다시 삶의 기어를 올려볼 시간이 되었다. 사실 올해 봄에 다시 또 지긋지긋하게 찾아온 계절성 우울증 때문에 약 먹느라 3월은 조금 심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었는데, 4월을 내내 쉬고 돌아오니 컨디션이 많이 돌아온 것 같다. 이제는 다시 기운을 차리고 열심히 살리라 다짐해본다.

돈 열심히 벌어서 다음 한국갈때도 꼭 유리그릇에 밥주는 비즈니스 탈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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